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1985년 6월22일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노조·선일섬유노조·효성물산노조 간부들이 무엇에 쫓기듯 조심스럽게 청계피복노조가 사무실로 쓰고 있는 평화의 집으로 왔다.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청계노조 간부들과 한자리에 모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여기는 공개된 장소이기 때문에 보안상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정보당국이 알고 덮칠 수도 있으니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깁시다."

손님을 맞이하는 입장인 청계노조에서 제안을 했다. 이에 따라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자를 따라나섰다. 이들은 평화의 집 근처에 있는 어느 봉제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한밤중에 공장 바닥에 빙 둘러앉은 20여명의 노조간부들은 긴장 속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대우어패럴 자본은 올봄 임금인상 파업투쟁을 주도한 우리 노조간부를 고소·고발하고 정권은 이것을 빌미로 김준용 위원장을 비롯한 간부 3명을 연행해 구속시켰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대우어패럴 단위노조에 대한 탄압으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 민주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예고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공동으로 교육하고, 공동으로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했던 것처럼 공동으로 맞서 투쟁해야 합니다."

대우어패럴노조의 제안을 주제로 회의가 진행됐다. 토론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청계노조 복구 이후 새롭게 결성된 자주적인 노동조합들 간에 긴밀한 교류와 공동투쟁을 해 왔던 터여서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결의와 구체적인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청계노조로 모이는 구로공단 노동자들

이날 회의 결과 6월24일 오후 2시를 기점으로 참여 가능한 사업장은 동맹파업을 하기로 했다.

사실 이날 이런 결의를 도출해 내기까지 그동안 목적의식적인 활동이 있었다. 84년 청계노조 복구에 이어 전개된 합법성 쟁취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한테 상당한 자신감을 줬다. 특히 80년 광주 민중항쟁을 겪은 뒤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투신한 이들과 의식화된 노동자들은 70년대 민주노조의 성과와 한계를 인식하면서 현장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84년 4월 청계노조 복구에 이어 구로공단 등지에서 민주노조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9일 대우어패럴노조, 6월11일 선일섬유노조·효성물산노조 등이 결성됐다.

이들 민주노조는 합동교육을 통해 교류했다. 70년대 민주노조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70년대 민주노조의 한계는 기업별노조로서 각개격파를 당한 것이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연대의 틀을 굳건히 다지기 위해 의식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어 85년 봄 임금인상 투쟁은 구로공단 노조들이 단체교섭과 파업시기를 맞춰 공동으로 대응했다.

김준용 대우어패럴노조 위원장은 70년대 말 청계노조에서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군에 입대한 뒤 제대하고 구로공단 대우어패럴에 입사해 노동운동을 한 청계노조 출신이다. 그는 이미 군 입대 전에 노조활동과 야학을 통해 의식화됐고 70년대 민주노조들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활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구로공단에서 규모가 큰 공장에 취직해 노조를 만들고, 기업별노조의 틀을 벗어나려는 활동을 해 왔던 것이다.

대우어패럴노조 간부 구속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대우어패럴노조 하나를 깨는 게 아니라 민주노조 모두를 없애려는 속내가 드러난 사건이었다. 연대활동을 했던 노조간부들은 동맹파업을 결정했다. 조직을 투쟁체제로 전환하고 사업장별로 의견을 모아 하루 만에 동맹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마침내 6월24일이 왔다.

"노조간부 석방하라!"

"민주노조 탄압 말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집시법·언론기본법 폐지하라!"

"노동부 장관 물러나라!"

구로공단에 구호가 울려 퍼졌다.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오전에 먼저 파업에 들어갔다. 이어 오후 2시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 등 3개 민주노조가 동맹파업에 참여했다.

청계노조는 영세사업장이 모여 지역으로 조직된 노조라서 파업으로 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민주단체와 민주적인 노동단체들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 내고 가두시위와 농성으로 연대투쟁을 했다.

이렇게 시작된 4개 노조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은 물이 끊기고 전기가 차단됐지만 노동자들은 주린 배를 움켜잡고 6일간이나 투쟁했다. 투쟁은 들불처럼 확산돼 29일까지 5개 사업체 6개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했다. 힘이 못 미치는 가리봉전자·부흥사·세진전자·롬 코리아·남성전기·삼성제약 등 5개 사업장에서는 잔업 거부 후 농성, 중식거부 같은 방식으로 지지투쟁을 벌였다.

70년대 노동운동 한계 극복하는 방법

구로공단 곳곳에서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선전물이 배포돼 공단 노동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다. 또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같은 노동운동단체와 청년·농민·여성 운동세력이 서울을 중심으로 전라도·경상도에서 지지농성·지지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때 청계노조 평화의 집은 구로동맹파업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하는 진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파업을 지지하는 농성자들, 파업으로 인해 오갈 곳 없는 노동자들이 대거 평화의 집으로 몰려왔다. 이소선은 이들을 맞아 격려하고, 먹을 것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어머니, 저희들이 몰려와서 힘들지요."

"이거 하려고 집 산 거 아니냐. 하나도 힘 안 든다. 노동자들로 이 집이 미어터지니 기운이 솟구친다."

평화의 집으로 몰려온 노동자들은 이소선의 따뜻한 보살핌에 의지해 투쟁에 나섰다. 청계노조도 확실하게 연대투쟁에 동참하기 위해 집행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결과 청계노조를 대표하는 간부를 선정했다. 그가 파업 중인 사업장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운동 탄압에 책임이 있는 기관을 점거하기로 했다. 일부는 당시 신민당 종로지구당을 점거하고, 일부는 청계노조 사무장인 김영대가 구로공단 노동자들을 이끌고 노동청 중부지방사무소를 점거했다.

6월29일 대우어패럴노조 농성장에 학생 18명이 식량과 의약품을 갖고 진입했다. 농성을 해체시킬 준비를 하던 자본가측은 이를 기화로 폭력단 500여명을 동원해 농성자들을 폭력으로 해산시켰다.

청계노조 사무실과 다른 세 곳에서 지지농성을 하던 민중운동 세력은 대우어패럴노조 농성이 강제로 해산되자, 오후에 성명서를 발표하고 해산했다. 6월30일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했던 효성물산노조 조합원 36명도 성명서를 발표한 뒤 5일간의 농성을 풀었다.

6일간의 동맹파업 결과 구속자 43명, 불구속자 38명, 구류자 47명과 해고자 1천500여명이 발생했다. 김영대 청계노조 사무장도 구속자에 포함됐다.

이소선은 김영대의 구속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김영대는 아프리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에 신혼에다 갓난아이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 대의를 위해 기꺼이 구속의 길에 나선 것에 대해 미안하고 고맙기까지 했다.

구로동맹파업은 정치파업의 성격을 띤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연대투쟁을 의식적으로 실천한 파업이었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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