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역사연구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모습 속에는 사뭇 광적인 요소가 있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걸출한 승부사, 역전의 명수 노무현이 풍기는 강한 매력이 으뜸 요인이 아닐까 싶다.

2000년 총선 당시 노무현은 서울 종로구 공천을 포기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부산지역에 출마했다. 호남지역에 기반을 둔 정당 후보로서 영남지역 한복판에 뛰어든 것이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낙선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행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노무현을 일약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부상시켰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은 절대 열세인 상황을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통해 돌파했고 정몽준이 막판에 단일화 합의를 파기했음에도 최종 승리를 거머쥐었다. 2004년에는 탄핵을 당하는 처지였지만 이를 총선 승리의 계기로 만들었다.

노무현의 승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재직시 뇌물 수수를 둘러싸고 검찰 수사가 조여 오던 상황에서 노무현은 2009년 5월 유서에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다"는 구절을 남긴 채 스스로 몸을 던져 세상을 하직했다. 노무현의 지지자들 사이에 번져 가던 냉소주의는 일거에 날아가 버렸다. 노무현이 못다 이룬 정치적 꿈은 대중의 가슴속에 다시금 지펴지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자신의 정치여정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통해 또 한 번의 반전을 일궈 낸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번 노무현 6주기 추모행사장에서 드러난 강경 친노세력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행위는 노무현 생애 최대의 실수였다.

노무현은 대통령 임기 내내 신자유주의에 올인했다. 신자유주의 열차의 브레이크 구실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줄곧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로 인해 가장 큰 희생을 겪은 것은 다름 아닌 청년세대였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2004년 현재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103%에 이르렀으며 전국의 주택보급률 역시 102.2%에 이르고 있다. 1인 다주택 소유를 감안한다 해도 주택보급률이 매우 높아졌음은 분명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세대라면 평수에 관계없이 자기 집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새로이 집을 구입하거나 임대해야 하는 수요는 소득계층과 관계없이 부모로부터 독립해 살림을 차려야 하는 청년세대에 집중돼 있다. 부동산을 둘러싼 갈등구도가 소득계층에서 세대로 바뀐 것이다. 매우 중요한 지형 변화가 일어난 셈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김대중 정부가 아파트 분양가를 건설사들이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한 것이다. 말 그대로 수익 극대화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시장논리에 내맡겼다. 이 같은 기조는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심지어 공익을 우선해야 할 (나중에 LH로 합친) 토지공사와 주택공사마저 수익창출을 우선하기 시작했다.

공기업까지 가세한 상태에서 건설사들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아파트 분양가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서울의 동시분양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는 98년 543만원에서 2004년 1천263만원으로 2.3배나 폭등했다. 분양가가 뛰자 기존 아파트 시세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실제로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2005년 10월까지 전국의 아파트 시가총액은 무려 276조원이나 늘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아파트 분양가는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6년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분양가가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두세 배나 비싸졌고 전월세 또한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 대란이 터진 것이다.

이 시기는 90년대 10대를 보낸 청년세대의 상당수가 결혼을 하면서 주거 공간 마련에 골몰하던 때였다. 도리 없이 청년세대는 아파트를 구입하거나 전월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당한 액수를 대출받아야 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그 빚을 갚느라 허우적거리고 있다. 감당하기 쉽지 않으리만큼 무거운 짐이 청년세대의 인생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분양가 자율화로 아파트 분양가가 천정부지로 뛰자 시민단체에서는 정부를 향해 공사원가 공개를 요구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주택공사로 하여금 원가를 공개하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이를 거부했다. 시장 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노무현은 퇴임 후 스스로 고백했듯이 재임 기간 내내 신자유주의를 대안으로 사고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정치집단은 청년세대에 대해 명백히 가해자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은 퇴임 이후 자신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반성했어야 했다. 동시에 지지들에게도 이를 요구했어야 했다. 그런데 노무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강경 친노세력으로 하여금 가해자로서의 반성 여지를 없애고 피해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었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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