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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79] 굳건한 터전 마련해 3차 합법성 쟁취투쟁 벌이다
   
▲ 평화의 집 개관식에서 기도하는 이소선. 민병덕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이소선과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은 1984년 마지막날을 투쟁과 구류로 보냈다. 그리고 85년을 맞이했다. 당시 정세는 2·12 총선을 앞두고 유화국면이었다. 청계노조는 이 기간 동안 물적 토대를 확실하게 다지는 일을 해냈다.

첫 번째로 85년 2월 서울 종로구 창신동 106번지에 독일 ‘인간의 대지’에서 지원을 받아 노조 소유 건물을 마련하고 ‘평화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다. 평화의 집은 K.N.C.C 사회선교협의회에서 일하던 최혁배가 독일 비정부기구(NGO)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에 한국 노동상황을 알린 것이 계기가 돼 만들어지게 됐다.

평화의 집과 전태일기념관을 마련

독일 인간의 대지는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가 지은 동명소설에서 이름을 따왔다. 소설 내용처럼 휴머니즘을 표방하며, 특히 아동과 청소년 문제에 초점을 맞춘 단체다. 최혁배는 이 단체에서 아시아를 담당하는 테오 돔과 긴밀하게 연결해 한국 상황을 알렸다.

테오 돔은 친구인 귄터 브로이덴베르크 오스나브뤼크대 교수로부터 70년대 동백림 사건·김지하 사건·김대중 사건에 대해 듣고 한국 인권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 뒤 그는 한국 인권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한국위원회'에 참여했다. 브라이덴슈타인씨 등과 함께 한국 인권개선 활동을 하던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70년대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한국에 와 본 그는 80년대 한국 인권을 개선하는 활동을 하기 위해 다시 한국에 왔다가 최혁배를 만나게 됐다.

테오 돔은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평화시장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현실을 공부했다. ‘민중’과 같은 한국어도 배웠다. 특히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대부분 10대라는 점에 놀라워했다. 그에게 전태일 사건은 곧 청소년 노동착취 문제였다.

그는 코리아(Korea)라는 소책자를 발간해 독일인들에게 청계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렸다. 그의 강연을 들은 10대 학생들은 "전태일의 뜻을 기리자"는 집회를 열었고 모금도 했다. 테오 돔은 한국 노동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 이유로 당시 안전기획부 블랙리스트에 올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소선은 한국을 방문한 테오 돔을 만나고 나서 그의 열정과 성실함에 감탄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청계천 주변 공장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그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이때 이소선은 어렸을 때 동네 청년한테 배웠던 두세 마디 영어로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

청계노조는 인간의 대지에서 지원받은 돈으로 창신동 골목에 한옥을 매입했다. 매입 당사자는 이소선과 청계노조 간부로 했다. 공동명의로 한 이유는 노조 명의로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별도 법인을 만들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가 물러가면 그때 법인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름은 평화의 집으로 정했다. 평화의 집 개관식에는 민주단체는 물론 야당 정치인들도 대거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소선은 “우리의 소원이 이뤄져 이제는 독재정권이 우리를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남의 건물에 세 들면 경찰·안기부가 건물주한테 압력을 넣어 쫓겨나는 신세였는데 이제는 우리 집을 갖게 돼 좋다”고 말했다.

참석자들과 창신동 사람들은 술과 떡과 고기를 나누면서 평화의 집 개관을 축하했다.

청계노조는 평화의 집에 이어 ‘전태일기념관’도 마련했다. 전태일 기념관건립위원회는 국내 모금이 여의치 않아 미국 연합장로회에 프로젝트를 신청했는데, 이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미국 연합장로회에 신청한 돈은 한국 기독교단체를 통해 도착했다. 그런데 프로젝트 자금으로 건물을 매입하면 그 소유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청계노조와 한국 기독교단체 간에 이견이 생겼다. 청계노조는 노조 당사자 명의로 소유해야 받을 수 있다는 의견이었고, 기독교단체는 종단 명의로 하되 언제든지 자유롭게 사용해도 된다는 의견이었다. 청계노조는 자금 수령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85년 6월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가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동대문상가 아파트 두 채를 매입해 전태일기념관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소유등기는 이소선·문익환·민종덕 공동명의로 했다.

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이 승리했다. 민정당 2중대로 불리는 유사 야당인 민한당을 공중분해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총선 이후 유화국면이 끝나고 또다시 탄압국면으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됐다. 그래서 결혼 적령기가 된 청계노조 간부들은 유화국면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다시 탄압국면이 시작되면 쫓기거나 구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혼기를 놓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계노조 간부들은 85년 2월부터 3월 말까지 거의 매주 한 쌍씩 결혼식을 올렸다.

이소선은 이들의 결혼식 때마다 그들의 또 다른 어머니로 결혼식에 참석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노동자가 되라고 격려하고 당부했다.

제3차 합법성 쟁취투쟁

겨울 동안 준비를 마친 청계노조는 85년 봄이 되자 합법성 쟁취투쟁의 길로 나아갔다. 84년 1·2차 투쟁에 이어 3차 합법성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차에 걸친 합법성 쟁취 가두시위로 경찰의 대비는 더욱더 광범위하고 치밀해질 게 뻔했다. 이에 맞서 청계노조도 그에 못지않은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야 했다. 경찰의 허점을 찌르고 가두시위를 성공시킬 방안을 궁리했다.

청계노조는 봄이 되자마자 3차 합법성 쟁취대회를 예고했다. 85년 4월12일 오후 1시에 1·2차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요구조건을 내걸고 대회를 연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래 놓고 노조는 “이번에는 날짜를 변경해서 기습적으로 가두시위를 할 것이다. 바로 4월8일 청계노조 복구 1주년을 맞이해 대대적인 합법성 쟁취 가두투쟁을 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이 말은 동대문경찰서 정보과 형사들한테도 들어갔다. 투쟁 지도부는 그걸 노렸다. 4월12일 거사를 앞두고 사전에 경찰의 작전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4월8일이 되자 청계천·을지로·종로 일대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경찰이 쫙 깔렸다. 청계노조 투쟁 지도부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경찰이 어떻게 배치되고 어떻게 경비하는지 실제 상황을 점검하려던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지도부는 이날 아침 일찍부터 배치된 경찰 상황을 점검했다. 그리고 3차 가두시위를 하기 좋은 장소를 찾으러 다녔다.

예상대로 경찰은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반경 2킬로미터 정도를 삼엄하게 경비했다. 상황을 점검한 준비팀은 여의치는 않지만 그래도 초동에 진압되지 않고 대오를 형성할 수 있는 장소로 신당동 시구문 옆 한양공고 앞 로터리를 택했다. 시구문 옆에도 경찰차가 배치돼 있기는 하지만 이들 경찰을 초장에 많은 숫자의 시위대가 제압하고 뚫으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인 4월12일이 됐다. 동화상가·을지상가·연쇄상가·통일상가 등 공장이 있는 각 상가들은 철시를 하고 경찰들이 철통같이 막았다. 청계천 일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후 1시20분 점심시간을 기해 신당동 중앙시장·무학빌딩 등에 흩어져서 신호를 기다리던 시위대들은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일제히 용수철처럼 뛰어나왔다. 이들은 순식간에 스크럼을 짜고 시구문 옆을 지키던 경찰을 제압해 밀어붙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근처 골목길에 흩어져 있던 시위대들이 홍수처럼 신당동 로터리에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는 1·2차 때보다 많았다. 2천500여명이나 됐다. 로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면서 평화시장 방향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청계노조 인정하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신당동 로터리 주위 건물에 있는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다가 밖으로 뛰어나와 시위대에 합류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경찰은 서울운동장 옆에 방어선을 치고 최루탄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고 투석으로 맞섰다.

경찰은 빠르게 병력을 증강해 시위대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천천히 약수동 방향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있는 파출소를 시위대가 에워싸고 공격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파출소 밖에서 공격만 하고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경찰은 시위대 위세에 눌려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대신 엄청난 물량의 최루탄을 퍼부었다. 이날 시위는 4시간가량 신당동·약수동을 휩쓸고 한남동 한강다리까지 떠밀리면서 지칠 때까지 이어졌다. 시위 과정에서 경찰 순찰차 한 대와 시위 진압용 차량 한 대가 불에 탔다.

경찰은 시위가 끝나고 귀가하는 시민들의 손을 일일이 검사했다. 돌멩이를 던진 흙 묻은 손은 무조건 연행했다. 그러나 경찰이 연행한 사람들은 단순가담자나 구경꾼뿐이었다. 주동자급은 한 사람도 연행하지 못했다.

이소선은 평화의 집에서 시시각각 진행 상황을 전해 들으면서 마음을 졸였다. 시위를 마치고 저녁때 평화의 집으로 돌아온 조합원들은 온몸에 노란 최루가스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소선은 눈물 콧물 재채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조합원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에 감사했다. 이소선은 조합원들의 옷을 벗겨 털어 주고, 속옷도 빨아 줬다. 눈이 매워 연신 눈물을 흘렸지만 이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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