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자동차회사 폭스바겐의 노동이사였던 페터 하르츠의 이름을 딴 ‘하르츠 개혁’은 1990년대 10% 내외로 치솟았던 독일의 높은 실업률을 잡기 위해 2003년부터 3년간 추진된 노동시장 개혁방안이다.

'어젠다 2010'으로도 불리는 하르츠 개혁은 실업자에 대한 지원 중심으로 이뤄진 독일사회 복지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 침체에 빠진 독일경제를 활성화하자는 취지로 단행됐다. 이른바 ‘독일병’을 치료하기 위한 긴급 처방전이었던 셈이다.

2003년 하르츠 개혁이 추진된 지 12년이 지났지만 하르츠 개혁의 성과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까지도 독일사회를 달구고 있다. 하르츠 개혁이 독일사회 고용증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시장 취약계층이 늘고 고착화하는 그늘진 이면을 함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르츠 개혁은 16년간 유지돼 온 기독민주연합·기독사회연합과 자유민주당의 오랜 보수연합 정권을 선거에서 물리치고 새롭게 등장한 사민당·녹색당의 적록연정 2기 초반을 이끈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주도로 이뤄졌다. 슈뢰더가 당수였던 사민당은 2002년 총선에서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하르츠 위원회(Hartzreform)를 구성했다.

하르츠 위원회는 재계 6명, 학계 2명, 정계 3명, 노동계 2명, 기타 2명 등 각계 인사 15명으로 꾸려졌다. 페터 하르츠가 위원장을 맡아 운영된 하르츠위원회는 활동 결과를 ‘하르츠 보고서’로 정리해 제출했다. 사민당은 보고서를 기초로 ‘하르츠 법안’을 성안해 의회에서 인준을 받았다. 법안은 2003년 1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됐다.<표 참조>
 

 


하르츠 개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실업 감소를 위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고용서비스 전달체계 개편, 그리고 노동시장 규제완화다. 노동과 복지가 연계된 강력한 워크페어(workfare) 정책으로 실업자들을 노동시장으로 적극 유인하고, 저임금·단시간 일자리를 늘려 고용률을 높이는 전략을 취했다.

보편적 복지를 강조하는 사민당 정권이 “일하지 않으면 지원도 없다”는 워크페어 정신에 입각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주도한 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르츠 개혁은 아직도 '논쟁 중'

하르츠 보고서는 당시 400만명을 웃돌았던 실업자수를 3년 안에 절반으로 줄인다는 목표 아래 13개 개혁모듈로 구성된 전면적인 노동시장 개혁안을 제시했다. 보고서에 담긴 13개 개혁모듈은 △잡센터 설립 개혁 △가정 상황 고려한 일자리 알선과 실직 전 일자리 중개 △구직자 일자리 수용의무 강화 △청년 향상훈련시장 활성화 △중고령자 고용촉진 프로그램 △실업부조와 사회부조를 실업급여Ⅱ로 통합 △고용확대기업 지원 △전국 잡센터에 인력서비스사무소(PSA) 설치 △1인 창업 지원과 미니잡 활성화 △연방고용청(BA) 구조개혁 △주고용청 역량센터로 전환 △실업자 채용기업 재정지원 △각계 공동노력 천명이다.

핵심은 경미고용 혹은 450유로 일자리로 불리는 ‘미니잡’이다. 현재 독일에는 800만개에 육박하는 미니잡 일자리가 형성돼 있다.

미니잡 도입의 정책적 목표는 두 가지다. 경력단절여성의 노동시장 재통합과 장기 만성실업자의 노동시장 편입이다. 이와 관련해 유휴 여성노동력을 노동시장으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짧은 노동시간과 미니잡에 부여되는 근로소득 면세·사회보험료 면제 혜택이 전일제 정규직 배우자를 가진 여성에게는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노동자뿐 아니라 사업주에 대해서도 정규직에 비해 적은 노동비용을 부담하도록 제도가 설계돼 있어 미니잡에 대한 사업주들의 선호 역시 높은 편이다.

반면 경력단절여성의 노동시장 재통합 통로를 저임금·단순직무로 좁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여성단독가구나 여성가구주로서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 경우 저임금·단시간 일자리 외의 선택지를 찾기 힘들어졌다. 생계부양 책임을 진 여성노동자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다.

실업자의 노동시장 통합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가 더 많다. 미니잡을 통해 제공되는 일자리는 성격상 숙련을 요하지 않는 단순직무가 대부분이다. 정규직 노동시장으로 이동하려는 실업자들은 이직을 위한 경력개발이나 직업능력개발 지원을 받지 못한다.

미니잡이 정규직 노동시장 진입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단시간·저임금 일자리를 고착화하는 문제를 낳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르츠 개혁의 또 다른 주요 의제는 고용 중심적인 복지체제 구축이다. 독일 정부는 실업자라는 표현을 없애고 구직자로 개념화하는 등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노동시장정책을 폈다. 실업급여 수급기간을 기존 최장 32개월에서 18개월(55세 이상)로 축소하고, 실업자 구직의무를 강화했다. 구직자가 임금이 적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거절하면 실업급여를 삭감했다.

이와 함께 복지 따로 일자리 중개 따로였던 고용서비스 전달체계를 원스톱 방식으로 간소화했다.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잡센터’를 신설하고, 잡센터 안에 일자리 중개 기능을 전담하는 인력서비스사무소(PSA)를 설치했다. PSA는 민간업체들로부터 불공정 거래라는 비판을 듣고 이후 폐지됐지만, 고용서비스 개선방안은 지속적으로 추진됐다.

하르츠 개혁안은 4개의 법안으로 분리돼 법령화되고 2003년부터 3년간 시행됐다. 하르츠 법안은 독자적인 법률이 아니라 노동시장과 사회정책에 대한 기존 법령 개정방안을 집약해 놓은 것이다. 3년에 걸친 하르츠 개혁이 종료된 뒤 최대 500만명에 달했던 독일의 실업자수는 현재 절반 이하인 200만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고용률 70%의 비결, 하르츠 개혁이냐 노사 주도 협상이냐

하르츠 개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하르츠 개혁이 고용률 증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시장 취약계층 확대와 고착화라는 부정적 효과를 동반했기 때문이다.

올해 3월 한국을 찾은 하르트무트 자이퍼트 전 한스뵈클러재단 사회경제연구소장은 독일사회가 고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노동시간단축을 비롯한 노사합의를 꼽았다. 자이퍼트 소장은 “독일 노사는 일과 가정의 영립이나 경제위기시 집단해고를 방지하기 위해 노동시간계좌제 같은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을 활용해 왔다”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이 같은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을 통해 해고를 막고 70% 이상의 고용률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독일의 안정적인 노동시장은 하르츠 개혁이 아니라 노동시간단축과 조정정책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금속노조 자문위원을 지낸 이문호 워크인연구소 소장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이 소장은 “독일 노사가 함께 위기를 인식하고 자율적 합의를 통해 작업장 혁신을 이뤄 낸 것이 고용률 70%의 비결”이라며 “그런 면에서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사용자들에게 더 큰 해고의 자유를 주겠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한국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선 방안에 한국 노동계가 반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했다.

하르츠 개혁을 벤치마킹하겠다고 나선 한국 정부를 향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고용서비스 전달체계 전반의 인프라를 강화해 일자리 중개의 효율성을 증진한 점은 따라 배울 만하지만 미니잡 활성화 같은 노동시장 규제완화는 저임금 일자리를 늘려 불안정 고용을 확대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며 “하르츠 개혁의 일부 모듈만을 강조하고 벤치마킹하기보다는 개별모듈이 전체적으로 연계돼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염두에 두고 전반적인 노동시장 개선 패키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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