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중이 삼국지를 집필하면서 가장 공을 돌인 인물은 제갈공명이었다. 제갈공명은 말 그대로 삼국지의 주인공이다. 제갈공명이 삼고초려 끝에 자신을 찾은 유비에게 처음 제시한 전략이 천하삼분지계였다. 조조의 위와 손권의 오에 맞서 촉을 근거지로 확보한 뒤 천하통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하삼분지계는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던 진보진영에 의해 자주 원용됐다. 지금으로 말하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에 맞서 독자적인 정치영역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1997년까지는 민주정부 수립으로 힘을 모으자는 민주대연합노선에 가려 천하삼분지계가 크게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에 올인하면서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진보정당의 공간이 크게 확장됐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내걸면서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2006년에 접어들어서는 당 지지율이 20%를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통상적 수준에서 수권 정당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은 신자유주의 후과가 뚜렷해지면서 대중의 신뢰를 빠르게 잃어 가고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신자유주의의 허구성이 여지없이 폭로됐다. 진보정당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면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과감한 진보적 정계개편을 단행함으로써 진보개혁세력의 대표주자로 나설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일각에서 이야기했던 2012년 진보 집권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진보정당은 낡은 정파구도에 발목이 잡혀 분당을 거듭하면서 이 모든 기회를 허공으로 날려 버리고 말았다.

현재 진보정당운동은 통합진보당 강제해산까지 겹쳐 찬바람이 부는 황량한 벌판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당장 내년 총선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놓고 이러저런 구상이 뒤섞이고 있다. 대부분 구차한 연명책을 강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발상을 바꿔야 한다. 지금 시기 천하삼분지계는 현실순응적인 소극적 전략일 수 있다. 해답은 오직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길을 앞장서 열어 가고자 할 때 찾을 수 있다.

정치 불신과 냉소가 극에 달해 있음에도 한 가지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새누리당이 재집권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정권교체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지금의 새정치연합을 보면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진보정당이 대안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지금으로서는 기대할 수 없다.

진보개혁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새정치연합과 군소 진보정당들은 모두 과거의존적인 정당이다. 새정치연합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치적 유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군소 진보정당들은 과거 급진적 운동권이 배태한 낡은 정파구도에 의존해 왔다. 이제 과거의존적인 낡은 질서는 모두 혁파해야 한다. 과거연합을 미래연합으로 대체해야 하며 새로운 사회를 열어 나갈 ‘진보적 국민정당’으로 재구성돼야 한다.

4·29 재보선에서 광주시민들은 천정배 후보에게 압승을 안겨다 줬다. 중요한 것은 천 후보 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광주시민의 선택 속에 숨어 있는 전략적 메시지다. 과거 약체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급부상시켰던 것에서 확인되듯이 광주는 광주로 머물지 않는다. 광주의 민심은 전국적 판도의 민심 변화를 이끌어 내는 진원지다. 그러한 광주 민심이 낡은 정치질서 혁파 쪽으로 흐르고 있다.

정치의 요체는 흐름을 타는 것이다. 내년 총선은 ‘낡은 정치질서 혁파, 진보적 국민정당 건설’이 비전으로 제시된 가운데 기존 정치판을 갈아엎는 격렬한 전투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정권교체 비전을 결합해야 한다. 새정치연합을 배제하고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도 없지만 거꾸로 새정치연합만으로 정권교체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정권교체는 오직 국민의 힘, 대중의 힘으로 가능하다. 이를 위해 초당적인 ‘대선승리 국민운동체’를 기획해야 한다. 진보적 국민정당은 그 조직적 성과와 맞물려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올해부터 대선이 예정된 2017년에 이르는 3년은 향후 30년의 역사를 좌우하는 결정적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는 새로운 사회 비전을 확립하는 것이다. 진보적 국민정당도 그러한 비전 공유를 바탕으로 건설될 수 있다. 새로운 사회의 비전이 대중 속에 씨앗으로 뿌려져 싹을 틔우고 있다. 그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돈 중심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으로 잉태된 ‘사람 중심 사회’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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