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고위당국자들은 1997년 12월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추진해온 기업·금융·공공·노동 등 4대부문 `개혁' 가운데 노동 부문의 속도가 가장 더디다고 거듭 주장했다.

하지만 국내 노동시장 상황을 보여주는 각종 통계자료는 노동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대로 상징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매우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제금융 사태 이전 45% 수준에 머물던 비정규직 노동자는 1999년 1분기엔 전체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다. 정부가 금리 인하와 재정 확대 등을 통해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펴며 경기가 회복되던 시기에 오히려 급증한 것이다. 지난해엔 거의53%에 이르렀다. 불과 몇년 사이에 늘어난 비정규직 노동자가 거의 100만명이나 된다. 구제금융 사태 이후 2000년까지 3년간의 비정규직 증가율은 이전 15년간의 증가율과 맞먹는다.

비정규직이 급증한 요인으로는 산업구조 변화와 함께 기업의 고용전략, 노동시장에서의 공급쪽 요인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을 택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는 각종 설문조사 결과 등을 감안하면, 기업의 노동력관리전략의 `유연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게 중론이다. 1998년 파견근로자보호를 구실로 시행된 근로자파견법과 정리해고제 완화가 기업의 노동력관리전략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전국 성인남녀 40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지난해5월 발표한 `21세기 한국 고용구조와 대책'은 비정규직의 급속한 확산이 일시적인 마찰실업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 조사에서 비정규직의 하나인 임시직노동자의 경우 현재 직장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27.7%가 `스스로 좋아서'라고 응답한 반면, `다른 대안이 없어서'는 55.4%, `다른 직장을 구할 때까지 임시로'는 16.9%에 이르렀다. 일용직 역시 `스스로 원해서'는 24%에 불과했다.

한국비정규직센터 박영삼 정책국장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완화는 노동시장불안과 부의 불평등 문제를 고쳐가는 개혁 과제인데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통로가 막힌 채 정부의 과제에서조차 밀려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규제개혁위원회는 재계의 이해가 반영되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고, 노사정위원회에서도 노사의`주고받기' 속에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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