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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중심성을 복원하자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수년 전 독일에 체류하던 중에 현 사회민주당 당수이자 전 환경부장관을 역임한 지그마 가브리엘(Sigma Gabriel) 당시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FES) 총재의 연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힘 있는 명연설가인 그의 여러 언명 중 내 귀를 송곳처럼 찌른 내용이 있었다. 표현을 완전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바람직한 사회는 노동자들이 8시간 일하고, 8시간 쉬고, 8시간 자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체제로 경제성장을 이룬 후, 민주화를 경과하면서, 8시간 노동 관행을 안착시키기 전에, 다시 글로벌 무한경쟁하에서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지배되는 경제체제를 꾸리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사실상 8시간 노동이라고 하는 정상관행의 보편화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길게 노동을 수행하는 한국 사회에서 8시간 노동을 토대로 한 일과 가정의 양립은 마치 사치이자 특권처럼 여겨진다. 장시간 노동은 부지런함을 의미하는 미덕이고, 평일 저녁 가정을 떠나 있는 남성 직장인들의 모습은 매우 익숙하다. 대부분 나라에서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이 우리 사회에서는 정상적이다.

대체로 정규직에게 과도한 노동투여를 요구하고, 다양한 인센티브를 통해 그들의 초과근로를 유도하는 것이 보편화돼 있다. 노동시장의 또 다른 한 편에서는 그러한 ‘비정상적인’ 정규직 일자리 진입기회 자체가 차단된 청년들이 울상을 지으며 대기하고 있다. 안정적인 노동기회·보너스·승진·훈련기회, 그리고 퇴직할 때까지 정년이 보장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에서 비켜나 있는 가운데 저임금·쉬운 해고·단기고용·저숙련·높은 대체가능성 등 상식적으로 ‘비정형’ 내지 ‘비정상’이라 할 형태의 일자리가 그들의 세계에서는 다수를 차지한다.

노동세계에서 이러한 비정상성은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끼친다. 누군가 정규직이 아니라면, 그가 오직 노동을 수행한 대가로 소득을 올리고, 그것에 기초해 가족의 생계를 돌보고 재산을 형성하며, 그 과정에서 사회보험이나 소득세 납부를 통해 노후에 굳이 스스로 노동을 하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그런 우리가 익히 알던 정상적인 류의 삶을 과연 꾸려 갈 수 있을까.

그것이 여의치 않음은 오늘날 정규직 진입장벽에 막혀 있는 청년세대들이 애인 만들기도 결혼하기도 포기하는 모습에서 곧장 확인된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정규직이 이기적으로 부당하게 고임금을 독점하고 있어 그렇게 됐다고 해석하지만, 그것은 얕은 생각이다. 필자는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의 노동중심성이 약화된 것에서 문제가 기인한다고 본다. 지금은 노동을 수행한 대가에 대한 가치평가가 자본을 운용해 파생되는 가치보다 못한 상황이다. 그 이전이 그나마 상대적으로 ‘노동중심적 자본주의 사회’였다면, 이제는 가히 ‘자본중심적 자본주의 사회’가 된 것이다.

한 사회에서 노동중심성이 약화되면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노동력의 가치는 전체적으로 폄하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일자리 질의 전반적인 저하를 초래한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막론한다.

사회는 여전히 자본 내지 자산을 충분히 소유하지 못한 대중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과거에 비해 단위시간 노동에 대한 실질적인 가치가 저하된 상태에서도 낮은 가격에 노동력을 판매할 준비가 돼 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자본은 보다 저렴한 일자리를 제공하려 한다. 양질의 숙련노동을 양성하는 것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생산을 통해 획득한 가치를 노동을 매개로 한 새로운 투자를 거쳐 확대시키려 하기보다, 부동산이나 주식 등 노동 비매개적인 자산증식 수단에 투자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름하여 금융화(financialization) 경향이다.

이러한 사회는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자산이 없는 사람들이 노동을 통해 중산층이 되기란 더욱더 요원해진다. 정규직 임금을 낮춰 일자리를 만든다고 한들 8시간 노동으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던 그 시절의 정상적인 사회 모습이 쉽게 도래하겠는가.

답은 경제사회체제를 운용함에 있어 노동중심성을 복원하는 것에 있다. 기업이 무한경쟁 시대에 시장의 불확실성 속에서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악조건에 놓여 있다고 해도, 시민이자 국민인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통해 가족을 꾸리고 여생을 안정적으로 보낼 수 있는 일자리가 다수인 사회를 만들려는 원칙을 추구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적 정치체제의 존립은 바로 그러한 원칙을 현실화하라는 정언명령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박명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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