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필름 시절 모두 같이 ‘공돌이’였던 울산의 노동자는 이제 중대형 아파트에 살며 그랜저를 모는 ‘직영계급’, 소형 임대주택에서 아반떼를 타는 ‘하청계급’,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돌아다니는 ‘알바계급’으로 나뉘었다. 현대자동차 하청노동자로 들어가는 건 ‘행운’이고, 직영노동자가 되는 건 ‘로또’가 됐다. 사원증과 출입증이라는 신분의 표상이 강해질수록 정규직에 대한 적대감이 재벌에 대한 분노보다 커져 간다. 지주보다 마름이 더 밉다지 않던가.”(<노동여지도> 37쪽 중에서>

우리나라 노동시장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르포르타주가 출간됐다. 노동운동 활동가 박점규(44)씨가 최근 펴낸 <노동여지도>(사진·얄마·1만6천800원·392쪽)다.

20년 가까이 노동운동 활동가로 살아온 저자는 지난해 3월 ‘삼성의 도시’ 경기도 수원에서 시작해 올해 4월 ‘책의 도시’ 경기도 파주에 이르기까지 전국 28개 지역의 노동현장을 찾아다니며 풍경을 그려 냈다.

전국 28개 지역 '불안정 노동현장' 포착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우리나라 노동지도는 크게 달라졌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해고자들이 낙엽처럼 쓸려 나가고, 간신히 살아남은 노동자들의 자리도 위태해졌다. 법원이 정리해고 사유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기업 미래의 어려움'까지 걱정해 주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은 ‘쉽게 쓰고 쉽게 버리는’ 일회용품으로 전락했다.

저자가 <노동여지도>에서 그리는 노동현장 풍경은 이처럼 신산하다. 송경동 시인이 추천사에서 표현한 것처럼 일상이 세월호 선실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노동’이라는 뼈마디와 장기와 근육과 핏줄이 어떤 상태인지, ‘자본’이라는 종양이 어디서 어떻게 창궐하며 이 사회의 건강을 무너뜨리는지 세밀하게 보여 준다.

파견노동자 투입이 금지된 제조업체에 ‘불법파견 사람장사’가 기승을 부리는 경기도 안산에서 저자가 만난 하청노동자들은 실제 세월호 침몰로 희생된 단원고 아이들의 부모였다. 그뿐이랴. “직영이냐”는 맞선 자리 질문에 모멸감을 곱씹고, 청춘을 바친 공장을 지키기 위해 고공의 굴뚝에 오르고, 열차사고가 났을 때 승객을 구조하면 ‘불법’이 되는 이 땅 불안정 노동자들의 절망이 페이지마다 아로새겨져 있다.

노동정치 실종, 재벌정치 세상의 슬픈 노동여지도

그럼에도 이 책은 노동의 희망을 흘려 넘기지 않는다. 1년여에 걸친 저자의 여정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도 곳곳에서 싹트고 있는 희망 덕분이다.

노동자들이 부도난 회사를 인수해 노동자자주관리회사로 일궈 낸 청주 우진교통, 노동조합과 병원장이 함께 의료 공공성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파주병원, 선배 노동자들이 성과급을 포기하는 대신 후배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킨 군산 타타대우상용차 등 저자가 노동현장에서 발견한 희망의 조짐은 작지만 뚜렷하다. 그리고 저자는 희망의 잎을 피워 내는 거름은 여전히 정치임을 강조한다.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서 노동을 위한 정치를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국가와 지방정부가 곳간을 헐어 만든 산업단지에서 대기업들은 나쁜 비정규직 일자리만 만들고 있었지만 이를 바로잡는 정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지갑을 털어 재벌의 금고를 채우는 정치를 바꾸지 못한다면 슬픈 노동여지도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노동여지도> 8쪽 서문 중에서)

1971년 인천에서 태어난 저자는 98년부터 민주노총에서 홍보·조직 업무를, 2003년부터 2011년까지 금속노조에서 선전홍보·단체교섭·비정규직 조직 업무를 했다. 2010년 현대차 울산1공장에서 진행된 사내하청 노동자 점거파업에 동참하고, 2011년과 2013년 희망버스 기획단으로 활동했다.

최근에는 전·현직 언론사 기자들과 쌍용차 농성장 소식을 다룬 <굴뚝신문>을 제작해 배포했다. 현재는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비없세)와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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