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만약 여러분이 KTX를 타고 있다면 무척 긴장을 해야 한다. 갑자기 복도 화장실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면 아마도 승무원을 급하게 찾아서 알릴 것이다. 그러나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불이 났을 때 소화기를 찾아 불을 끄는 것은 승무원의 업무가 아니다. 갑자기 옆 사람이 복통을 일으켜서 구급약을 필요로 한다고 해 보자. 그때도 여러분은 승무원을 급하게 찾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잘못됐다. KTX 승무원은 구급약을 갖고 있지 않다. 불이 나거나 구급약이 필요하다면 여러분은 승무원을 찾는 대신 KTX에 단 한 명뿐인 열차팀장을 찾아야 한다.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그런데 이것은 코레일이 내놓은 자료에 있는 내용이다. "승무원은 안전업무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 말이다.

KTX 승무원들이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대법원은 코레일과 여승무원 사이에는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며, 불법파견도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의 판단은, 승무원을 감독하는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 업무와 철도유통 소속 KTX 승무원 업무가 사실상 구분돼 있다는 것에 근거한다.

코레일이 고속철도 운행과 관련한 승무업무를 안전업무와 승객서비스업무로 나누었고, 열차팀장은 안전업무를 담당하고 여승무원들은 승객서비스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위급상황에서는 승무원이 안전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지만 이는 이례적인 상황일 뿐 승무원의 일상적인 업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코레일이 낸 자료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코레일이 과연 공기업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철도공사는 KTX를 도입하면서 승무원들을 자회사인 철도유통으로 고용했다. 말로는 곧 정규직화할 것이라고 했지만 자회사를 바꿔 가며 고용했고, 노동조건도 좀처럼 개선하지 않았다. 그때는 당연히 승무원들이 안전업무를 했고 당연히 그것이 자신들의 업무라고 여겼다.

하지만 2004년 여승무원들이 철도노조 소속이 되고 직접고용을 외치자, 불법파견으로 판정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승무원과 열차팀장의 업무를 분리해 버렸다. 한 번 운행할 때 1천명 가까이 타고 고속으로 달리는 KTX에 단 한 명이 안전업무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승무원들은 당연히 안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왔다. 하지만 대법원은 코레일의 주장을 받아들여 버렸다.

안전을 승객 서비스의 가장 중요한 업무라고 믿는 KTX 승무원들은 아마도 사고가 난다면 최선을 다해서 승객을 구조하는 등 안전업무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KTX 여승무원은 안전업무를 담당하지 않는다는 구분법을 제시한 코레일은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안전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안전교육은 서류상으로만 이뤄진다. 두툼한 안전 관련 자료집을 사무실에 비치하고 오가는 승무원들에게 ‘읽었다’는 서명을 받는 방식이다. 승무원이 단순 고객안내서비스를 담당한다는 이유로 안전교육도 실시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승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보면 77%가 열차 화재 등 비상대응방법을 교육받지 못했고, 95%의 승무원들이 신규승무원 안전교육이 이뤄지지 않아서 비상대처가 어렵다고 답했다.

우리는 코레일이라는 공기업이 승무원을 비정규직으로 유지하기 위해 승객들의 안전과 생명을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팽개칠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세월호 참사는 이처럼 기업의 이윤을 위해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정부 정책과 기업의 탐욕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적어도 세월호 참사를 겪은 정부라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정부가 내놓은 것은 안전대책이 아니라 안전산업 발전방향이었다. 안전펀드를 조성해서 안전산업에 투자하고, 민간손해보험을 활성화하고, 안전업무를 외주화하는 내용이다. 안전마저도 돈벌이 수단으로 삼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이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정부, 진실을 가리는 데에만 혈안이 돼 있는 정부는 KTX 안전마저도 돈벌이의 제물로 던져 놓고, 대법원은 불법파견이 아니라면서 그것을 정당화해 주고 있다. 그래 놓고는 걱정이 되기는 했는지 원청이 직접 교육훈련을 하는 것을 불법파견 징표로 삼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사내하도급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당연히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안전업무를 맡기면 될 것을, 단지 비정규직을 합법화하기 위해 불법파견마저 합법화하겠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1년. ‘우리는 세월호의 승무원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냈던 KTX 승무원들의 절절한 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노동자 권리와 시민 안전은 연결돼 있다. 기업의 탐욕과 그 탐욕을 부추기는 정부를 통제할 수 있어야 권리를 제대로 지킬 수 있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