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말 속에 본질이 가려져 있어요. ‘일반해고 요건 완화’라고 하지 말고 ‘좀 더 쉽게 자르기 위해’라고 해야죠. ‘저성과자 해고제도’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일 못하는 놈 자르는 제도’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이때 일 못하는 놈이 누구겠어요. 사장 마음에 안 드는 놈, 노조간부잖아요. 87년 이후 자본과 정부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이었던 적이 없어요.”

서형석(59·사진) 민주노총 서울본부장의 말이다. 서 본부장은 최근 결렬된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의 노동시장 구조개선 논의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서 본부장은 “정부가 정부다워야 3자 협의도 가능하다”며 “노동자 착취에 눈먼 자본, 자본 편만 들겠다는 정부와의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서 본부장은 서울지하철노조 출신이다.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된 87년 노동운동에 뛰어든 민주노조운동 1세대다. 94년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지협) 공동파업과 99년 서울지하철노조 4·19 파업을 주도한 이유로 해고된 뒤 2012년 6월 복직했다. 내년이면 정년을 맞는다. 지난해 12월 사상 첫 조합원 직선제로 당선된 서 본부장은 “노동운동 활동가로서 마지막 소임을 다하겠다는 생각”이라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노동자 권익을 증진할 수 있도록 서울시내 25개 자치구에 협의회를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동운동이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조직체계를 재정비하고, 이를 조직확대 계기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0일 오전 서울 은평구 녹번동 서울본부 임원실에서 서 본부장을 만났다.

"첫 직선제 본부장, 책임감·부담감 크다"

- 본부장에 당선된 지 4개월 정도 지났다. 첫 직선제 본부장인데.


“처음 직선제로 선출됐다는 점에서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낀다. 올해 민주노총이 출범 20주년을 맞았다. 새로운 20년을 위한 토대를 어떻게 잘 만들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서울본부 내부적으로는 조직체계 재정비에 힘을 쏟고 있다. 4월 총파업 조직화에 주력할 것이다.”

- 간선제 때와는 분위기가 다를 것 같다. 조직 내부에 변화가 느껴지나.

“차이가 직접적으로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다만 선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토론을 벌여서인지 서울본부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다. 서울본부 결정사항을 대하는 단위노조 대표자들의 태도에서도 진지함이 느껴진다. 분위기가 좋다. 서울지역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적합한 사업과 조직체계를 만들어 내는 일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 ‘조직체계 개편’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구체적으로 구상하는 바가 있다면.

“서울에는 총연맹도 있고 산별연맹 본부도 있다. 이들 조직의 활동이 왕성하기 때문에 서울본부는 존재감을 발휘하기 어렵다. 서울본부가 그동안 미조직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에 집중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남들이 돌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국지적으로 활동을 벌인 측면이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노동자 권익 실현을 위해 보다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조직체계 개편을 준비 중이다. 서울시내 25개 자치구마다 협의회를 만들 생각이다. 지금은 6개 지구협의회로 대충 묶여 있는데, 노조간부 회의체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역접근성도 떨어진다.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 민주노총 깃발을 꽂아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 본질은 중간착취"

- 25개 구협의회 신설이 중소·영세 사업장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본부장이 되고 보니, 장기투쟁 사업장 농성장을 본부장이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 별로 잘하는 일 같지가 않다. 그것보다는 서울지역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구 단위 협의회를 떠올렸다. 협의회가 안착하면 동마다 하부조직을 만들고, 구청들과 정례협의를 진행할 생각이다. 구협의회가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 사업을 위한 거점이 되는 것이다. 지난번 아파트 경비노동자 분신사태가 벌어졌을 때 연대투쟁을 갔었다. 그때 이렇게 투쟁해서는 이기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서울본부가 집회를 열거나 지원금을 마련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비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구협의회 신설을 뼈대로 하는 조직개편을 통해 지역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과 사회적 위상을 끌어올리겠다.”

- 통신업종 간접고용 문제를 비롯해 서울지역에도 비정규직 현안이 산적해 있다.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보나.

“너무 옛날 말 같지만, 중간착취가 근본적인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대재벌만 착취하는 게 아니다. 소자본의 중간착취로 피곤한 인생을 사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너무 많다. 이들을 착취구조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이다. 서울시 지자체에서 청소업무 등을 위탁한 민간업체가 모두 117개다. 이런 업체들도 부를 세습하고 있다. 사장이 그만두면 아들이 자리를 잇는다. 이들이 부를 대물림하는 동안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시달리며 궂은일을 도맡아 왔다. 구협의회가 만들어지고 구청과 정례협의가 이뤄지면 민간위탁 직영전환을 1순위 요구안으로 제시할 생각이다. 종합적으로 기획해서 차근차근 포석을 놓아 가며 사업을 진행하면, 지금보다는 한결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 지난해 본부장 선거 당시 ‘노동특별시 서울’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노동특별시는 어떤 도시인가.

“사실 ‘노동해방특별시’라고 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 레드 콤플렉스를 감안해 ‘해방’은 뺐다.(웃음) 노동운동이 지향하는 노동해방 세상을 서울부터 만들어 보자는 의미다. 노동특별시는 노동자 편 인사가 서울시를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노동자 권력 쟁취를 위해 진보정당 운동이 시도됐지만, 진보정당 활동가와 현장 노동자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했다. 정당 활동가들이 지역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70세가 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민주일반노조 숭실대분회를 만들어 고용승계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이분들 지난 대선 때 다 박근혜 대통령 찍었다. 그런데 지금은 ‘박근혜 그X이 그럴 줄 몰랐다’고 얘기한다. 운동이 현장으로 스며들 때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라서 외롭지 않다"

- 서울로부터 사업비 지원을 받을 것인지를 놓고 서울본부 내부에서 논란이 된 바 있다. 현재 재정 상태는 어떤가.

“서울시가 매년 예산을 편성할 때 한국노총 서울본부 몫으로 20억원, 민주노총 서울본부 몫으로 15억원을 책정한다. 우리는 그 돈을 받지 않는다. 과거 서울지하철노조가 서울시에서 지원금을 받기도, 안 받기도 했다. 어용 집행부가 들어서면 돈을 주고, 민주파가 들어오면 끊더라. 정부 지원에 종속되기보다는 자주적인 재정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서울본부의 경우 인건비 등 경직성 예산을 제하고 나면 순수 사업비로 6천만원이 남는다. 서울지하철노조 한 달 사업비도 안 되는 돈이다. 재정자립과 함께 조합원들에게 혜택을 주는 방안이 뭘까 고민 중이다. 서울지역 노동자협동조합 연합회를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겪은 민주노조운동 1세대다. 당시 꿈꿨던 노동자가 살맛 나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끼나.

“더 엉망인 세상이다. 자본주의 착취구조는 갈수록 심화되고, 빈곤의 정도는 덜할지 몰라도 노동권 문제나 삶의 질 문제는 나아진 게 별로 없다. 각박하다. 그래도 이 얘기는 하고 싶다. 함께하기 때문에 우리는 외롭지 않다. 우리가 더불어 크게 단결할 때 행복지수도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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