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한 건설기업노조 쌍용건설지부장(민주노총 서울본부 통일위원장)
백두산 평화기행이다. 누가 거부할 것인가. 홍순관 건설기업노조 위원장의 제안을 받은 후 만사를 제쳐 두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난관도 없지 않았다. 5월1일 남북노동자축구대회 서울지역 예선일이 백두산에 가 있을 지난달 28일로 잡혔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통일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는데 자리를 비워야 하니 난감했다. 다행히 행사를 함께 준비해 온 동지들의 적극적인 권유와 지원으로 백두산 평화기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 동지들께 감사드린다.

2007년 건설산업연맹 통일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와 달리 이번 백두산 평화기행은 의미가 남달랐다. 내가 다니는 쌍용건설은 최근 법정관리를 졸업하고 두바이펀드에 매각됐다. 회사뿐 아니라 노조로서도 중대한 변화와 도전의 국면이다. 이 시기를 잘 헤쳐 나가려면 큰 힘이 필요했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이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줄 것 같았다. 분단 70주년을 맞이해 백두산을 찾아가는 것 또한 통일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라 생각했다.

평화기행 첫날인 지난달 27일 부푼 마음을 안고 인천국제공항에 갔다. 처음 보는 나를 가장 먼저 환한 미소로 맞이해 준 이는 박승흡 매일노동뉴스 회장이었다. 평화기행에 참여한 동료들은 자주 만난 사람들처럼 살가웠고, 이내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창춘공항에 내렸다. 백두산 평화기행이 시작된 것이다. 일행 누구도 여정 내내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을 알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창춘공항에서 첫날 숙소인 연길까지 버스로만 5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달리는 버스는 어느새 만남의 광장이 됐다. 길동무들의 자기소개 시간이 펼쳐졌다. 노동·법조·정치·문화계 인사들이 골고루 참여했다. 연길에 도착한 나는 이종화 건설산업연맹 전국플랜트노조 위원장과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여행 기간 내내 이종화 위원장과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

평화기행 둘째 날(28일) 아침이 밝았다. 호텔을 나오니 빈하공원이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운동을 하는 시민들이 눈앞에 다가왔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기를 차는 어르신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 놀이라고 치부하는데, 어르신들이 아침운동으로 제기차기를 하니 놀라웠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제기 차는 발놀림이 마치 중국 무술의 초식을 보는 듯했다. 생기 넘치고 평화로운 이곳이 옛날 항일투쟁 격전지였다는 생각이 겹쳐 잠시 숙연해졌다.

첫 방문지는 조선족박물관과 혁명기념관이었다. 대리석으로 치장한 높고 커다란 박물관은 내부가 화려하고 웅장했다. 바닥과 천장까지 잘 가공된 대리석이 육중한 모습을 자랑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전적과 유물이 전시돼 있었다. 생소한 부대 이름과 투쟁 과정을 한 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으나 치열했던 항일투쟁사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다음은 봉오동 전적지였다. 청산리 대첩을 이끈 김좌진 장군에 대해선 익히 들은 바 있다. 반면 봉오동 전투를 지휘한 홍범도 장군은 낯설었다. 봉오동 전적지는 홍범도 장군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지금은 을씨년스럽고 잘 정돈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적비와 봉오저수지에 항일운동 역사가 수몰돼 있지만 용맹스러웠던 홍범도 장군의 기백과 기상은 수장시키지 못했을 터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 유홍준 교수가 말했듯이 모든 것이 남아 있는 곳보다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듯했다.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 적을 섬멸했던 홍범도 장군의 기백이 가슴 가득히 다가왔다. 가르쳐 주는 대로만 배우는 역사가 아니라 직접 찾아보고 진실을 알아 가려는 역사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역사 현장은 이제 중국과 북한과의 접경지인 도문으로 이어졌다. 그저 북녘 땅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짧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갈 수 있는 땅을 우리만 못 가는 땅이라 더 그러리라. 어린 시절 아버님을 따라 북녘 땅을 향해 절했던 부친의 고향 땅. 월남 후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버지! 제가 지금 두만강에 와 있습니다. 아버지 대신에.

다음 평화기행지는 간도 항일운동 중심지이자 민족교육의 산실인 용정이다. 이곳엔 헤이그특사로 파견됐던 이상설이 세운 근대 민족학교 서전서숙이 있다. 현재는 표지석만 있지만 역사적인 의미는 그대로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할 수 있는 선구자적 생각과 행동이 역사를 바꾸고 세상을 바꿨다. 서전서숙은 그런 곳이다.

일행은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를 찾았다.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시인의 학생 시절 모습이 정겨웠고, 역사는 이렇게 동지들과 함께 만들어 간다는 것을 느꼈다. 4·2 선언으로 남북통일의 문을 열었던 문익환 목사. 그 선언이 6·15 선언과 10·4 선언의 토대가 된 것을 생각하면 대성중학교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윤동주 시인이 어릴 적 공부하던 책상을 재현한 곳에서 윤동주 흉상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의 정신도 마음에 함께 담았다. 용정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거리의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는 남쪽의 한옥과는 사뭇 다른 양식이었다. 지붕의 각도는 완만했고, 처마 끝의 각도 또한 예리함을 보였다. 아마도 북방지역의 특수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음날 오전 파란 하늘이 열리고, 하얗게 얼어붙은 백두산 천지를 봤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볼 수 있는 백두산 천지. 일행은 모두 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벅찬 가슴을 안고 장정에 나섰다. 백두산 주변지인 송강하에서 단둥까지 무려 10시간의 버스여행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 기착지인 통화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또다시 버스를 타고 가는 강행군을 했다. 장정 끝에 기어이 일행은 단둥에 도착했고, 여장을 풀었다.

여정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오전에 압록강단교와 위화도를 찾았다. 북쪽 신의주가 눈에 들어왔고, 달리는 버스 창가로 보이는 압록강은 한 걸음에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좁았다. 단교는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절단된 다리 끝에 놓인 포탄 두 발이 강인한 인상을 심어 줬다. 단교 끝에서 바라보는 북녘 땅 신의주.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신의주로 달려올 통일기차를 상상했다.

이성계가 7만 대군을 회군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웠던 역사적 장소, 바로 위화도다. 압록강가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위화도 주변을 돌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가야 할 목적지에 제대로 가고 있을까. 길을 잃거나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3박4일의 장정에서 소중한 분들을 만났다. 우리들은 삶을 나눴고, 역사 현장에서 미래를 생각했다. 여행은 새로운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라 했던가. 창춘에서 다롄까지의 장정에서 항일투쟁사를 새롭게 봤고, 그 항일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투쟁은 민족통일을 이루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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