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역사연구가

한국전쟁 발발 원인을 두고 오랫동안 첨예한 논쟁이 있었다. 논쟁의 초점은 전면전을 누가 주도했는가에 있었다. 북한은 북침을, 남한을 남침을, 미국의 일부 수정주의 학자들은 남침유도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배경은 1994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측에 건넨 한국전쟁 관련 소련 외교문서와 새롭게 공개된 미국 정부 문서, 한국전쟁 중 미군이 노획한 북한 기밀문서가 연구되면서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 북한 기밀문서는 현재 미국 메릴랜드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 중이다.

관련 문서의 진위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학자들은 조작된 흔적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적어도 남침인가 북침인가 혹은 남침을 유도한 것인가 하는 논쟁은 상당 정도 무의미해졌다.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출발은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였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북한 지도부의 무력통일 결심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중 하나로서 중국 공산당이 우세한 무력을 기반으로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점이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북한 지도부는 한반도 역시 무력을 기반으로 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는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 차이를 간과했다.

중일전쟁 개시와 함께 현대식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 대륙을 유린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중국 전역을 점령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중국은 실로 광대하기 짝이 없는 나라였다. 일본군 숫자가 100만명인데, 중국 촌락수가 이보다 두 배나 많은 200만개에 이를 정도였다. 각 마을마다 일본군 병사 1명을 배치한다고 해도 절반의 부락밖에 채울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군은 철로와 도로를 통해 이동하면서 해안을 따라 발달한 대도시를 점령하는 데 역점을 뒀다. 이러한 일본군의 작전 전개 때문에 대도시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국민당의 행정조직은 남김없이 무너졌다. 국민당 군대 역시 그 기반이 급속히 약화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당은 해안지대를 포기하고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충칭으로 본거지를 옮겨야 했다.

반면 공산당 산하 홍군은 마오쩌둥의 지구전 원리에 따라 일본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광활한 농촌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해 역량 손실을 최소화하면서도 일본군에 대해 효과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리하여 공산당과 홍군은 항일전쟁이 지속되면서 급속하게 세력이 커졌다. 1945년 항일전이 승리로 끝났을 무렵 공산당원은 120만명으로 늘어났고 홍군은 90만명의 대군으로 성장했다. 항일전이 승리로 끝났을 무렵 공산당은 정치적 힘에서나 무력에서 국민당을 훨씬 능가하게 됐다. 국공내전에서의 공산당 승리는 이미 예견돼 있었던 것이다.

국공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국민당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막대한 군수물자가 국민당 쪽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럼에도 국민당의 패색은 날로 짙어만 갔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이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결코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에 대해 전면적 공격을 감했지만 거대한 중국 대륙을 장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공산당을 키워 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사정은 어떠한가. 중국과 달리 미국은 한국전쟁에 즉각적이고도 전면적으로 개입했다. 만약 중국의 참전이 없었다면 북한 지역 전체가 미국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다. 북한과 미국의 역량 관계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지난 100년의 역사가 생생히 입증하듯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한반도는 내부가 분열되면 언제든지 외세 개입에 의해 나라가 통째로 짓이겨지고 갈라질 수 있는 운명이었다. 분단은 이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에 다름 아니다.

그런 만큼 한반도는 친일파 등 일부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는 민족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 헤쳐 나가야 겨우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민족 상생(혹인 민족 대단결)의 길을 걸어야 하는 처지였다.

만약 북한 지도부가 민족 상생의 관점을 갖고 있었다면 무력통일을 시도할 수 있었을까.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한쪽이 죽거나 굴복해야 끝나는 것으로, 피아간 상생의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결과가 말해 주듯 전쟁은 극단적 민족 분열로 치달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었다.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는 선택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북한 지도부는 한반도의 구체적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무력통일을 시도했다. 그 결과는 애초 목표였던 무력통일과 거리가 먼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희생과 분단의 고착화와 장기화였다. 과연 이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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