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다 칼로, <인생 만세>, 1954년, 메소나이트에 유채, 멕시코시티 프리다 칼로 박물관.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멕시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수박이다. 벌어진 껍질 사이로 은밀하게 드러난 씨앗들은 어쩐지 육감적이고, 핏빛의 즙 많은 과육은 생명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그림은 어떤 작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알고 있었고, 또 받아들였나 보다. 죽음의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삶에 대해 느낄 수밖에 없는 ‘절절한 애착’을 붉은 과육에 새겨 넣은 걸 보면 말이다. 맨 앞에 있는 선홍색 과일 조각을 자세히 보자. 작가는 핏빛 물감을 적신 붓으로 자기 이름과 날짜와 자신이 죽음을 맞게 될 장소인 ‘멕시코 코요아칸’이라는 글자를 써넣었다. 그러고는 커다란 대문자로 이렇게 적었다.

"인생 만세(VIVA LA VIDA)."

수박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수박 정물화’를 그린 작가는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다. 칼로는 이 그림을 그리고 8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쓰는 멕시코에서는 정물화를 ‘Naturaleza mueta’즉 ‘죽은 자연’이라고 칭한다. 정물화는 전통적으로 ‘삶의 무상함’이라는 주제를 전하는 용도로 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녀는 이 ‘죽은 자연’을 통해 생명과 삶을 찬양했다. 이는 이유가 있었다. 칼로는 말년에 병으로 인해 집 밖에 나갈 수 없었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침대에 누운 채 그림을 그려야 했기에, 칼로에게 진정으로 현실적인 대상이란 팔이 닿는 거리에 있는 것이었다. 시선을 가까운 곳으로 돌렸던 그녀는 말년에 사물이나 과일, 꺾어 온 꽃 같은 ‘죽은 자연’에서 기어코 생명을 찾아내고, 삶을 찬양했다. 그건 칼로가 살아온 47년이란 시간 대부분이, 죽음에 대항해 지난하게 싸워 온 과정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6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이때 아무도 이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가 평생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 누워 지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가혹하게도, 칼로에게 고통은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척수성 소아마비로 판정받은 데 이어 열여덟 살이었던 1925년 9월17일에는 치명적인 교통사고까지 당하고 말았다. 칼로는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이 버스가 전차와 충돌했던 것이다. 이 충격으로 칼로는 버스 앞으로 튕겨져 나갔는데 그 순간 강철로 된 버스손잡이 기둥이 마치 투우사의 칼처럼 칼로의 옆 가슴을 뚫고 들어가 허벅지로 나왔다. 골반과 자궁이 관통당한 동시에 척추는 3조각이 나 버렸고, 쇄골과 늑골 2개가 부러졌다. 다리는 11군데나 부러지고 어깨와 골반은 원형복구가 어려울 만큼 으스러졌다. 신장도 망가져 한때 소변을 볼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칼로는 꼬박 9개월을 몸 전체에 깁스를 한 채 보냈고, 평생 7차례의 척추수술을 포함해 32번의 외과수술을 받아야 했다. 사고 여파로 몇 차례 유산도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고통은 의학도를 꿈꿨던 칼로를 ‘위대한 예술가’로 키워 냈다. 줄곧 누워 있어야 했던 칼로는 그림을 통해 생존의 의지를 겨우 붙잡았던 것이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칼로는 특수 이젤을 네 기둥 침대에 고정시키고 천장거울을 붙여서, 침대에 누워 있는 스스로를 모델 삼아 자신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 인고의 시절은 마침내 칼로를 예술가로 만들었던 것이다. 프리다가 평생 남긴 200여점의 작품 중 대부분이 바로 자화상이었다. 상처 입은 자신의 몸을 보면서 삶의 근원을 그려 낼 에너지를 뽑아낸 것이다. 프리다 개인의 삶이 프리다의 예술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아직도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으며, 곧 다시 걷게 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나는 석고 깁스를 하고 있는데, 견딜 수 없이 무겁지만 그래도 등의 아픔을 덜어 준다. 고통스럽지는 않다. 단지 몹시 피곤하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자주 절망에 빠진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 그럼에도 살고 싶다.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프리다 칼로의 1951년 일기 중)

‘삶에 대한 투지’가 넘치는 칼로의 ‘아픈 자화상’들은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조용한 격렬함", "부드러움과 잔혹함이 뒤섞인 삶에 대한 진실한 증언",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한 떨림을 지닌 가장 잔혹한 미술기록"이라는 평가가 잇따랐다.

1938년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땐 대공황 시기임에도 작품의 절반이 넘는 25점이 판매됐다. 1939년 프랑스 파리의 초현실주의자들이 칼로를 초대해 전시회를 열었을 때도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칼로는 자신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라고 정의하는 데 대해 단호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의 그림은 나의 현실을 그린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무엇보다 칼로의 ‘삶에 대한 열정’은 죽기 11일 전의 행적에서 드러난다. 칼로는 위대한 예술가인 동시에, ‘뜨거운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다. 평소 자신이 1907년생이 아니라 멕시코 혁명이 일어난 1910년생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가 ‘멕시코 혁명이 낳은 유산’이라는 걸 은연중에 드러낼 정도였다.

그런 그녀였기에 과테말라 대통령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의 소식을 들은 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진보적인 정책을 펴다 미국의 미움을 받은 아르벤스 구스만이 CIA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됐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그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녀에겐 바로 눈앞에 바짝 다가온 죽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1954년 7월2일 많은 양의 진통제를 주사한 채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미국의 과테말라 정치개입에 반대하고 아르벤스 구스만 대통령과 과테말라 공산당을 후원하기 위한 집회에 참여했다.

이때 칼로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겨운 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불편하고 소란스러운 거리로 직접 나왔다. 무엇이 그녀를 침대 밖으로 이끌었을까. 비록 자신이 이 땅을 곧 떠나더라도, 좀 더 정의롭고 좋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아니었을까. 칼로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죽음보다 삶이 먼저였던 것 같다.

그리고 때가 왔다. 그해 7월13일 새벽, 온갖 고난과 장애를 숱하게 타 넘고 이겨 냈던 칼로였지만 이번에는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기관지 폐렴에서 회복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의사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무리하게 외출한 탓에, 그만 폐렴이 재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공식 사인은 ‘폐색전증’이었다. 칼로는 무수한 그림 외에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일기장도 남겼다. 검은색 천사가 날아오르는 그림이 그려진 칼로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단호하지만 슬픈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져 있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그림이 남긴 메시지는 ‘삶이여, 만세’라는 찬양이었다. 하지만 일기장에는 ‘삶 속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담겼다. 어느 쪽이 칼로의 진심이었을까. 아마도 둘 다였을지 모른다.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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