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삼척시 동양시멘트 신광산 들머리에 위장도급 철폐 등 구호가 담긴 만장이 걸려 있다. 농성장을 지키던 한 조합원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계단처럼 생긴 황토색 민둥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시멘트의 주원료인 석회석을 캐는 광산이다. 온통 검은색인 무연탄 광산과 색깔만 다를 뿐이다. 산골 노동자들이 목숨 걸고 일하는 ‘막장’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민둥산 꼭대기에 있는 석회석 야적장을 향해 크고 작은 덤프트럭 행렬이 이어진다. 전에 없던 광경이다. 민둥산 중턱에 개발된 광산에서 채굴한 석회석은 덤프트럭에 실려 야적장으로 옮겨진다. 여느 때 같으면 덤프트럭을 몰고 민둥산을 오르내렸을 최창동 강원영동지역노조 위원장은 이제 먼발치에서 작업현장을 바라보는 처지가 됐다. 그는 지난달 28일 직장에서 해고됐다. 최 위원장을 포함해 101명이 회사에서 잘렸다. 인근에서 호출된 개인차주가 그를 대신해 덤프트럭 핸들을 잡고 있다. 그는 “분통이 터진다”고 했다.

지난 25일 오후 <매일노동뉴스>가 찾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소재 동양시멘트 46·49광구. 이곳은 최씨가 20년 넘게 일한 곳이지만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 돼 버렸다. 광산 입구는 은색 철제문으로 가로막혔다. 철제문 앞에선 매일 아침 전쟁이 벌어진다. 해고자들이 빠진 자리에 대체인력을 투입하려는 동양시멘트 관리자들과 이들을 저지하려는 해고자들의 몸싸움이 아침을 알린다. “현장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품은 붉은색의 현수막이 이들의 전쟁을 내려다본다.

▲ <정기훈 기자>

동양시멘트 위장도급 사건의 재구성

“이렇게 아수라장이 될지는 몰랐어요. 정규직이 되는 줄 알고 기뻐했는데, 해고라니….”

지난달 13일 고용노동부 중부지방고용노동청 태백지청은 동양시멘트와 도급계약을 맺은 동일(주)과 (유)두성기업에 위장도급 판정을 내렸다. 동일이나 두성기업 같은 도급업체들은 실체가 없는 유령업체에 불과하다고 정부가 확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도급업체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원래부터 동양시멘트에 고용된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노동부 판정의 요지다. 노동부가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 무엇일까.

출입이 통제된 49광구를 대신해 차량으로 10분 정도 거리에 떨어진 46광구에 들어가 보니 이유를 짐작할 만했다. 이곳에는 해고자들을 대신해 동양시멘트 퇴직자와 인근에서 차출된 굴삭기·덤프 개인차주들이 석회석을 분주하게 나르고 있었다. 시멘트를 만드는 첫 공정이다.

작업공정은 복잡하지 않다. 드릴처럼 생긴 착암기로 석회석 덩어리에 구멍을 뚫어 화약을 넣어 폭파시킨다. 그러면 큰 바위덩어리 석회석이 지름 80센티미터 정도 크기로 분쇄된다. 이어 굴삭기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이 쪼개진 석회석을 덤프트럭에 옮겨 싣는다. 석회석을 실은 덤프트럭은 민둥산 꼭대기 야적장으로 석회석을 실어 나른다.

야적장으로 옮겨진 석회석은 폭 1미터 정도의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제조공정으로 이동한다. 옮겨지는 사이 추가로 분쇄가 이뤄져 지름 3~4센티미터 자갈크기로 쪼개진다. 컨베이어벨트의 끝은 시멘트 생산공장으로 이어지도록 돼 있다. 공장 안으로 들어온 석회석은 추가공정을 통해 밀가루 분자만큼 부서지는데, 이때 섭씨 4천도의 열을 가하면 매우 단단한 클링커(clinker)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클링커에 석고 등 부원료를 섞으면 시멘트 완제품이 만들어진다.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자동차가 한 대가 조립되는 완성차 공장의 흐름공정과 흡사한 구조다. 최 위원장이 일했던 채굴·운반공정은 시멘트 제조 핵심공정으로 분류된다.

▲ 최창동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동양시멘트지부장이 석회석 광산을 바라보고 있다. 정기훈 기자

원·하청 노동자 모든 작업 지휘한 동양시멘트

“석회석 채굴·운반공정은 물론이고요, 시멘트 생산공정에도 동양시멘트 정규직과 도급업체 직원들이 섞여 일했습니다. 설비가 고장나면 원·하청 노동자가 동시에 투입돼 수리를 했고요. 도급업체 사장은 업무 과정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어요. 동양시멘트 관리자들이 모든 걸 결정하고, 업무지시도 직접 했습니다. 무전기를 이용해서요.”

동일에서 3년간 덤프트럭을 몰았다는 이병열(35)씨를 비롯한 해고자들의 전언이다. 이씨의 주장은 태백지청 위장도급 판정문에 오롯이 담겨 있다. 판정문에 따르면 동일과 두성기업 같은 동양시멘트 도급업체들은 △17년 이상 오직 동양시멘트에서 채굴·운반 업무를 수행했고 △동양시멘트 사무실과 장비를 무상으로 사용했으며 △도급업체 사장은 동양시멘트가 결정하고 △동양시멘트 경영사항에 따라 동일과 두성기업 노동자들의 소속이 변경됐다.

무엇보다 이들 업체 노동자들은 동양시멘트 관리자로부터 업무지시를 받아 왔다. 판정문에 따르면 △동양시멘트가 도급업체 노동자의 연장근로·근로시간을 결정하고 △동양시멘트 관리자들이 도급업체 노동자가 수행할 작업량과 작업방법·순서·업무 협력방안을 도급업체 중간관리자를 통해 지시하고 △격려금이나 인센티브 지급대상과 지급액·지급일자 등을 결정했다. 동양시멘트가 도급업체 노동자들의 사용자로서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고 볼 만한 정황이다.

하청노동자 원청 시급 40% 받으면서 위험업무 전담

동일에서 근무한 해고노동자들은 “20년을 일한 노동자가 6천원 미만 시급을 받는 일도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지부에 따르면 하청업체 노동자 시급은 동양시멘트 정규직의 40~50% 수준이었다. 동일과 두성기업 노동자의 평균시급은 6천원을 조금 웃돈다. 반면 동양시멘트 정규직 노동자의 시급은 1만2천원 안팎이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동양시멘트 노동자들과 같은 일을 하지만 시급이 절반에도 못 미쳐 잔업으로 임금을 보전하는 실정이다. 김경래 노조 동양시멘트지부 부지부장은 월평균 260만원 안팎의 임금을 손에 쥔다. 김 부지부장의 시급은 5천880원이다. 한 달에 492시간(연장근로 249시간 포함)을 일한다.

이병열씨는 “동양시멘트 노동자는 하루 8시간만 일해도 한 달에 300만원 가까이 버는데 나는 월급이 150만원도 안 된다”며 “250만원 정도를 벌려면 매일 8시간씩, 매달 250시간의 잔업을 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이씨는 “하청업체 소속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은 차치하고 원청과 같은 일을 하는데 임금이 이렇게 차이날 수 있냐”고 반문했다.

12년차 덤프트럭 기사인 윤광채(55)씨는 “언젠가 (처우가) 좋아지겠지, 원청으로 갈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12년 동안 하면서 기다렸다”며 “12년 동안 최저임금을 받으면서도 동양시멘트를 위해 일했는데 해고를 당하니까 배신감이 치밀어 술 없이는 잠을 못 잔다”고 토로했다. 윤씨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걸 하지 않으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어 (위장도급 얘기를) 안 한 것이지 몰라서 안 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10년차 덤프트럭 기사인 박아무개(40)씨는 “(새벽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깜깜한 광산에서 라이트 불빛 하나로 석회석 더미를 운반했다”며 “바퀴를 잘못 틀어 낭떠러지로 추락할까 무서워 오줌을 찔끔 싼 적도 있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위험하고 힘들고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지난 25일 해고자들이 동양시멘트 삼척공장 건너편 천막농성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위장도급 철폐와 직접고용 등을 요구하며 이날로 23일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정기훈 기자

위장도급 20년, 정규직 전환으로 보상받겠다

지부는 고용노동부로부터 동양시멘트의 정규직 노동자라는 판정을 받은 만큼 직접고용을 위해 총력투쟁을 결의했다. 지부는 “동양시멘트는 하청업체 노동자를 20년 동안 노예처럼 부리고, 위장도급 판정을 받자마자 해고했다”며 “동양시멘트가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지부는 이달 9일 서울중앙지법에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동일에서 근무한 해고노동자 63명은 지난 18일 강원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다.

최창동 위원장은 “태백지청에서 위장도급 판정을 받던 날 안영철 사무국장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며 “동양시멘트 정규직으로 인정을 받자마자 해고되고, 15년 넘게 일한 광산에서 대체인력이 일하는 모습을 보니까 분통이 터진다”고 했다.

최 위원장은 “동양시멘트에 맞서 이길 때까지 투쟁해 동양시멘트 노동자 신분으로 광산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고용노동부는 조만간 동양시멘트 특별근로감독에 들어갈 예정이다.

▲ 석회석광산 모습 <정기훈 기자>

[상자] "도급업체? 원청 사업부"

국내 시멘트업계 2위인 동양시멘트의 사내하청업체 동일(주)과 (유)두성기업 대표이사가 각각 원청 부장·차장으로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동양시멘트는 지난해 3천269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리며 12.8%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다.

29일 강원영동지역노조 동양시멘트지부에 따르면 49광구에서 광산 생산과 판매를 담당하는 다물제이호의 대표는 최종구 동양시멘트 대표이사다. 직원은 6명이다. 다물제이호의 지분은 동양시멘트가 100% 소유하고 있다. 다물제이호는 동양시멘트 사내하청업체인 동일과 도급계약을 체결한 회사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동일 대표로 활동한 김아무개 전 대표는 동양시멘트 자원팀 차장으로 근무한 뒤 동일로 자리를 옮겼다. 2013년 1월부터 6월까지 대표였던 신아무개 전 대표는 동양시멘트 제품팀 부장으로 근무했다. 신 전 대표이사는 동일 대표를 사임한 뒤 두성기업 대표로 일했다. 두성의 대표였던 임아무개·박아무개 대표는 동양시멘트 총무팀·제품팀에서 근무한 바 있다.

중부지방고용노동청 태백지청은 “동일과 두성은 사업경영상 독립성과 인사노무관리상 독립성이 없어 동양시멘트의 노무대행기관과 동일시 할 수 있다”며 “동일과 두성의 근로자는 동양시멘트와의 묵시적 근로계약관계에 있다”고 판정했다.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은 “동일과 두성은 도급업체가 아니라 사실상 동양시멘트 사업부에 해당한다”며 “실제 사용자는 같은데 원청 출신 관리자를 내세워 법인을 설립한 뒤 사용자성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 실장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개정해 사용자성을 확대하고, 하청업체 노동자가 원청과 직접 교섭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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