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전태일 13주기 추도식을 성공리에 마친 청계모임은 자신감을 얻어 사기가 충천했다. 그 여세를 몰아 강제 해산된 청계피복노조를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청계모임은 이를 위해 1983년 12월1일 회의에서 민종덕에게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상근간사를 맡겼다.

청계모임은 내부 조직을 다지고 교육을 강화했다. 83년 말과 84년 초 겨울에는 기관원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연수 숙박교육을 했다. 당시에는 마땅한 교육장소가 없어 무척 애를 먹었다. 눈 쌓인 산길을 헤치며 가야 했던 과천의 영보수녀원을 단골로 이용했고, 송추계곡의 어느 한적한 집을 이용하기도 했다.

84년 봄이 되면서 청계모임의 목표가 서서히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청계피복노조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이를 추진하는 주체들이 무엇보다도 대중의 지지는 물론 현장 투쟁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노동조합을 복구하면 독재정권으로부터 불어닥칠 혹독한 탄압이 예상됐다. 그 예상되는 탄압을 이겨 내는 길은 오직 노조복구의 정당성에 기초한 명분과 2만여 청계천 노동자는 물론 전체 노동자와 시민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들을 확고하게 세우고 투쟁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신광용 석방 대책위 구성

투쟁을 통한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고리를 잡기 위해 고심하던 중 마침 84년 3월6일 신광용이 연행돼 구속되는 일이 발생했다. 신광용은 81년 아시아아메리카자유노동기구(아프리) 사건 때 3층에서 뛰어내려 부상을 당해 불구속 상태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동안 불구속 상태로 아무 말이 없다가 갑자기 구속시켜 버린 것이다.

이에 청계모임은 '신광용 동지 석방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책위원장으로 민종덕을, 부위원장으로 황만호·박계현·김성민·김향숙을, 그리고 간사로는 김영대를 뽑았다. 지금까지 이런 대책위는 대개 재야 유명 인사들로 구성됐다. 유명 인사들을 앞세워 싸워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당사자인 자신들이 대책위를 꾸리고 앞장서 싸우기로 했다. 신광용 석방투쟁이라는 고리를 활용해 조직력을 과시하고 아울러 투쟁의 경험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당시 정세는 유화국면이었다. 자신들이 효과적으로 대처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고, 승산이 있는 싸움을 통해 성과를 거둔다면 그만큼 조직력과 투쟁력이 강화될 것으로 판단했다.

'신광용 석방 대책위원회'는 신광용의 구속 경위와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독재정권의 청계피복노조 강제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부당한 행위에 항거하다 구속된 노동자들의 정당성을 알렸다. 그리고 구속된 신광용을 즉각 석방할 것과 노조 재건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아울러 대책위는 청계피복 노동자들을 상대로 근로조건 개선과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정부당국의 부당한 처사를 규탄하는 홍보활동을 하면서 대중성 확보 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3월20일 아침 8시30분 청계 노동자들이 출근하는 각 상가 길목에서 "근로자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유인물을 대대적으로 배포하기로 했다.

실행 전날 저녁 유인물 배포팀은 서울 신당동 자취방에 모여 아침에 유인물을 배포할 위치를 정하고 경찰이 연행하면 어떻게 행동하고, 연행됐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숙지했다. 그리고 유인물 배포조를 짰다. 이때 노동자들이 출근시간에 가장 많이 다니는 길목을 찾아봤다. 우선 평화시장·동화시장·을지상가·연쇄상가가 모여 있는 을지로 6가의 평화시장 앞길, 덕수중학교 정문 앞(지금의 프레야타운), 동화시장 입구 그리고 국립의료원 뒷골목에 인원을 집중 배치했다. 한 조를 3명 내지 4명으로 해서 4조 정도를 이곳에 배치했다.

그리고 신평화시장·부관시장(지금의 동평화시장)을 상대로 한 조, 동신상가 을지로 가정집공장 등에 한 조를 배치해 아침 8시30분에 동시에 유인물을 뿌리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약간의 긴장감과 기대감, 새로운 투쟁의 호기심을 가지고 유인물을 한 아름씩 안고 각자 배치된 위치로 갔다.

드디어 약속된 시간이 됐다. 유인물 배포팀은 일제히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노동자들한테 "근로자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큼지막한 유인물 한 장씩 배포했다.

노동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어! 노동조합이 없어진 것으로 알았는데 언제 생겼어요?"

"네. 노동조합이 강제로 해산됐지만 이제 우리 힘으로 다시 재건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맞아요. 노동조합이 있어야 근로조건이 개선되고 사장들이 우리한테 함부로 하지 않죠.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유인물을 받아 가면서 이런 격려의 말을 하는 노동자를 볼 때는 힘이 저절로 났다.

출근시간이 바빠 아무런 표정 없이 유인물만 받아 가는 사람들한테는 이쪽에서 "수고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유인물 배포자 쫓는 경찰

매우 드문 경우인데, 유인물을 받아 보고 관심이 없다는 듯이 되돌려 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럴 때는 힘이 빠졌지만 전체적으로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유인물 배포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소란했다. 돌아보니 상가 경비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유인물 배포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자 유인물 배포를 엄호하는 조가 나타나 상가 경비들을 막았다. 이미 이런 일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해서 엄호조를 배치해 놓은 것이다.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청계천 각 상가에서 노동자들과 상가측 사람들이 옥신각신하는 소리로 아침 출근시간에 난리법석이 일어났다. 이어 기동경찰들이 나타났다. 경찰들은 유인물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붙잡아 연행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유인물 배포조는 경찰들 따돌리면서 멈추지 않고 유인물을 계속 배포했다. 약이 오른 경찰들은 몇 사람의 남성 노동자들만 지목해서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리와 상가 건물구조를 더 잘 아는 노동자들은 이쪽 입구로 들어갔다가 경찰을 따돌리고 다른 출구로 나와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경찰이 또 쫓아오면 다시 상가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구멍으로 나왔다. 이렇게 쫓고 쫓기면서 유인물을 출근시간이 끝날 때까지 다 돌리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유인물 배포 중 중부경찰서에 연행된 회원들은 여섯 명이었다.

이날 아침에 벌어진 유인물 배포사건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상가 전체로 퍼졌다. '이제 노동자들이 뭔가 들고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으로 전체 작업장이 술렁였다. 노동자에게는 기대 섞인, 사용주들한테는 우려 섞인 소문이었다. 연행된 사람들은 10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나왔다.

유인물 배포 투쟁은 다음날 하루를 건너뛰었다. 바로 다음날 배포하면 경찰과 경비들이 어떻게 대비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22일 또다시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방법으로 유인물을 배포했다.

그날 아침에도 노동자들은 경찰들과 쫓고 쫓기면서 청계천 상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런데 경찰의 연행작전은 지난번과는 달랐다. 유인물 배포하는 사람을 무조건 연행하는 것이 아니라 민종덕 대책위원장을 지목해서 연행하려고 했다.

경찰이 그새 대책위에 대한 정보와 얼굴사진을 확보해 위원장만 쫓기 시작한 것이다. 유인물 배포팀은 위원장을 집중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결국 경찰의 물리적인 힘에 밀렸다. 위원장은 경찰에 붙잡혀 중부경찰서로 연행됐다.

민종덕은 이날 7시간 동안 중부경찰서 정보과장을 비롯한 정보과 형사들과 말씨름을 하다 풀려나왔다. 청계 노동자들의 이 같은 투쟁 상황을 시시각각 전해 들은 이소선은 이들을 격려하고 제발 몸 성히 안전하기를 기도했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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