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최근 경제 뉴스는 연일 디플레이션 관련 소식으로 넘친다. 특히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디플레이션 대책으로 임금인상을 얘기하면서 논쟁이 커졌다. 물가하락을 의미하는 디플레이션은 보통 두 가지 이유로 발생한다. 하나는 기름·철·구리 등 원자재 생산비가 줄어 제품 원가가 하락하고, 시장 가격도 떨어지는 경우다. 서민들 입장에서는 같은 예산으로 좀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할 수 있으니 나쁜 일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소비가 줄어 상품들이 시장에서 팔리지 않아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다. 현재 소득이 줄어 소비할 돈이 부족하거나 앞으로의 소득이 줄 것이라 예상돼 소비대신 저축을 할 때 발생한다. 소비가 줄어드니 생산도 줄고, 결국 고용도 줄어 경기가 침체된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이른바 불황이 된다.

최근 정부가 임금인상을 얘기하는 건 현재 물가하락 원인을 후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돈을 풀어 소비심리를 개선하는 방법도 있지만, 한국은 통화 신뢰도가 낮아 재정적자에 근본적인 제약이 있다. 더군다나 이명박 정부 시절 낭비적 재정지출로 인해 더욱 재정 제약이 커진 상태다. 정부가 돈을 쓰지 못하면, 민간기업들에게 돈을 풀라고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임금이 오르면 정부가 원하는 경제 활성화가 다시 이뤄질까. 재벌들이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임금이 실제 오르기도 힘들겠지만, 오르더라도 경기 선순환까지 가는 데에는 한 가지 큰 장애물이 있다. 바로 가계부채다.

한국의 가계부채 규모는 2014년 말 1천29조원이다. 5년 전에 비해 40%가 늘었다. 부도가 난 나라들을 제외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에서 가장 빠르게 부채가 늘고 있다. 그래서 최근 많은 경제학자들이 현재 디플레이션의 핵심 원인을 부채에서 찾기도 한다. 이자와 부채 상환 압력으로 소득을 소비에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득이 다소 오른다 해도 부채부터 갚게 될 수밖에 없어 소비 확대에 제약이 가해진다는 주장이다. 소득이 소비로 이어지지 못하면 경기 활성화 효과는 사라지고, 소득 증가→소비 증가→-생산 증가→고용 증가→소득 증가의 순환은 시작되지도 못한다.

그래서 정부는 지난해부터 부동산시장 활성화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 가계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동산 가격을 올리면, 가계부채의 핵심인 주택담보부대출에 대한 압박도 줄어들고, 자산 가격이 오르니 소비 심리도 살아난다는 셈법이었다. 물론 결과는 대실패다. 부동산 규제를 풀었지만 소비심리는커녕 전셋값만 오르는 부작용이 생겨 오히려 서민들의 소비심리를 더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면 왜 부동산시장은 정부 의도대로 활성화되지 않는가. 가계에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확신이 없어서다. 부동산 가격에는 법칙이 없다. 보통 제품은 원가가 정해져 있고 그 원가에 시장에서 형성되는 마진율을 붙여 가격을 정한다. 하지만 부동산은 건물을 짓는데 들어간 원가가 아니라 그 부동산의 미래 임대료나 매매 차익을 ‘예상’해서 현재 가격을 책정한다. 예상이 가격을 만들고, 그 예상은 과학적 기준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만들어진다. 결국 부동산시장이 정부 예상처럼 활성화되지 못하는 건, 웃긴 얘기지만 정부가 시민들을 잘 선동하지 못한 탓이다.

시민들이 부동산에 대해 기대를 갖지 못하는 건 또 왜 그런가. 역사적으로 보면 알 수 있다. 부동산시장 활성화는 언제나 성장이 꺾인 시기에 발생했다. 다시 말해 성장이 없으면 부동산 투기도 없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한국은 수출대기업을 제외하곤 국민경제의 발전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부동산 투기의 1세대라 할 강남 원정 투자단 '복부인'은 1970년대 말에 등장했다. 복부인은 한국 경제가 70년대 고도성장의 내리막으로 향할 때 등장해 대위기에 빠지는 1979년에 진정됐다. '떳다방'으로 상징되는 부동산 투기 2세대는 1988년 수도권 5대 신도시 개발 계획이 기폭제가 됐다. 이 역시 단군 이래 최대의 성장을 이룬 1985~1989년 3저 호황의 끝물에 나타난 현상이었고 열풍은 1991년 경제위기로 진정됐다. 부동산 투기 3세대는 2000년대 중반부터 등장해 2006년 '판교로또'로 정점에 이르렀다. 이 당시 투기 역시 외환위기 이후 빠른 경제회복이 정체되며 시작됐는데, 판교 등이 유례없는 상한가를 기록하던 당시 산업 전망에서는 저성장·산업공동화 등이 얘기되고 있었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로 이 투기 열풍도 끝을 맺었다.

성장의 끝이 금융화와 투기로 마무리 되는 건 어떤 점에서 자본주의의 법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자본은 이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달릴 때, 질적 저하를 양적 확대로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을 동원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자본은 이윤을 만드는 능력이 떨어지니 실제 자본이 아니라 미래의 수입을 미리 당겨다 자본으로 만들어 쓰는 가공자본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의 확대는 부동산 가격처럼 별 근거가 없는 미래 수입을 근거로 하기에 언제나 사기와 협잡이 판을 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성장의 중단과 금융화의 시작은 분배 문제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생산 그 자체의 문제다.

요컨대 현 정부가 임금을 올리자고 몇 가지 정책개혁을 하건,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하겠다고 시장규제를 풀건, 현재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흔히 말하는 위기는 이렇게 딱히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정부와 기업 모두 대책이 없으니, 이제 키를 쥔 곳은 노동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