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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73] 전태일 평전
편집부  |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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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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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 전태일 평전 초판 표지.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는 한동안 회장이 공석인 채로 활동하다가 1983년 3월28일 제1차 정기총회를 열고 문익환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공덕귀 여사는 남편인 윤보선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이 달라진 것 때문에 회장직을 사임하는 것이 좋겠다며 사임했다. 당시 윤보선 전 대통령은 신군부 정권에 우호적인 발언을 했다.

새 회장을 맞이한 기념관건립위원회는 의욕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그중에서도 82년 말부터 추진한 '전태일 평전' 출판사업은 괄목할 만했다.

전태일 평전은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된 조영래가 약 3년간에 걸쳐 집필한 것으로 원제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다.

전태일 일기장을 수배 중인 조영래에게 전하다

이소선은 아들 태일이가 남겨 놓은 일기장을 비롯해 평화시장에서 활동했던 기록물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간직했다. 비록 무허가 판잣집이지만 그것을 창고 한곳에 깊숙이 넣어 두고 아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남몰래 꺼내 놓고 대화를 하곤 했다.

이소선은 아들이 남겨 놓은 다섯 권의 일기장과 한 묶음의 설문지 등 전태일이 생전에 활동했던 기록물을 꺼내 놓고 이리저리 궁리를 하면서 담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내일 저것들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가지고 갈 수 있을까?’

이소선은 쌍문동 자신의 집에서 조영래가 숨어 사는 홍제동 집까지 전태일의 일기를 안전하게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인 조영래는 지인의 도움으로 홍제동의 한 단독주택 옥탑방에서 숨어 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이소선이 비밀리에 만나고 있었다.

조영래는 전태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사상과 감정을 복원해 내고 그 역사적 진실과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 번째로 전태일이 남긴 기록물을 읽고 연구하기로 한 것이다.

수배 중이어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조영래를 위해 이소선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태일의 일기를 가져가야 했다.

궁리 끝에 이소선은 내일 아침 일찍 늘 따라다니는 담당형사가 오기 전에 집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또 탄 버스에서 내려 다시 다른 버스를 갈아타고 홍제동까지 가기로 했다. 일기장은 그럴듯한 선물처럼 보이게 예쁜 보자기에 쌌다.

다음날 아침 이소선은 계획대로 차질 없이 실행했다.

조영래는 자료들을 꼼꼼히 읽고, 분석하고, 종합했다. 전태일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조영래는 이옥경과 비밀리에 결혼해서 갓난 아들까지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난 인연도 전태일에 의해서였다. 70년 전태일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조영래 부인 이옥경은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무관심한 사회를 비난하는 글을 한 신문에 실었고, 당시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조영래는 '이 훌륭한 여성이 누구인가' 하고 찾아 나섰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연애를 하고 결혼에 이르게 됐다.

이소선이 조영래를 집중적으로 만나서 구술한 시기는 75년 여름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소선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쌍문동에서 홍제동에 도착했다.

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부터 만났다. 이소선은 전태일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조영래는 받아 적고 질문했다. 그러다 보면 해는 점점 높아지고 더위도 맹렬해졌다. 더워지면 걸쳤던 옷을 하나씩 벗어던지며 두 사람은 작업에 몰두했다. 더위에 지친 이들을 위해 옆에서 지켜보던 이옥경은 냉수나 주스를 갖다 줬다.

하지만 마실 때뿐이다. 한낮이 되면 옥상의 복사열까지 밀려와 더 이상 옷을 벗을 수도 없고 참을 수도 없을 정도가 된다.

“어머니, 안 되겠습니다. 여기서는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우리 저 밑에 다방에 가서 합시다.”

“그래, 담배 한 대 피우고 해요.”

이들은 근처 유진상가 지하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고 이제 살 것 같네. 담배도 맘대로 피울 수 있고….”

이소선과 조영래는 담배를 매우 즐겼다. 특히 조영래는 평전 작업을 할 때 더 많은 담배를 피우는 것 같았다.

이소선과 조영래는 다방 구석 쪽에 앉아서 묻고 답하는 구술작업을 계속하고, 이옥경은 다방 입구에 앉아 혹시나 이상한 사람들이 덮치지나 않을까 망을 봤다.

이런 작업을 그해 여름 내내 했다. 조영래는 이소선뿐만 아니라 전태일의 친구 김영문 등 평화시장 노동자들도 이소선의 주선으로 만나 취재를 했다.

<전태일 평전> 탈고

이렇게 해서 76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을 붙인 <전태일 평전>이 탈고됐다.

조영래는 완성한 원고를 가지고 이소선을 만났다. 그 자리에 민종덕도 함께했다. 이들이 만난 곳은 서울 변두리 개포동의 어느 배 밭이었다. 당시만 해도 개포동은 개발되지 않은 변두리였다.

"이것은 태일이가 어머니한테 남긴 유산입니다. 어머니는 또 다른 아들 전태일을 낳은 것입니다."

이소선은 의롭고 가슴 따뜻한 지식인이 되살려 낸 아들의 부활을 어루만지며 "애썼다. 고맙다"는 말로 답했다.

조영래는 민종덕한테 말했다.

“자네가 이것을 복사 좀 해 보겠나? 다섯 부만 복사하게 그 이상 복사하면 절대 안 되네.”

민종덕은 조영래로부터 파란 표지의 두꺼운 대학노트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쓴 원고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복사기가 흔치 않았다. 더구나 수배를 당한 사람이 쓴 전태일에 관한 글을 아무 데서나 복사할 수가 없었다. 즉 복사기로 영업하는 곳에서 돈을 주고 복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글을 영업집에서 복사하다가 만약에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에 적발이라도 된다면 저자가 수배 중인 조영래라는 것이 밝혀지고 따라서 여러 사람이 잡혀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고민 끝에 당시 경동교회 야학교사인 박문수한테 부탁을 했다. 박문수는 삼도물산 사무직이라 사무실에 복사기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문수는 회사 직원들이 다 퇴근한 뒤 밤중에 사무실에 몰래 들어가 원고를 청사진 기계로 복사했다.

그렇게 복사한 <전태일 평전> 한 권을 민종덕이 소장하게 됐다.

민종덕은 전태일의 생애를 거의 완벽하게 복원해 낸 전태일 평전에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 전태일 일기만 읽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을 받았다. 그는 남몰래 자기 혼자만 감동을 느끼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자신이 받은 감동과 체계적으로 정리된 전태일 사상을 다른 사람들한테 말로 전해 보려 했으나 그것은 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글을 통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민종덕은 <전태일 평전>이 하루라도 빨리 출판돼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조영래가 혼신의 노력으로 완성한 평전을 엄혹한 유신독재 체제인 국내에서 출판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원고는 손학규·김정남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78년 11월 일본어로 먼저 출판됐다.(일본어판 제목은 炎よ,わたしをつつめ-ある韓國靑年勞動者の生と死-).

일본어판 저자는 김영기(金英琪)다. 영(英)은 조영래를, 기(琪)는 장기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평전을 기획한 것은 장기표였다. 장기표는 바쁘기도 하고, 아무래도 글을 쓰는 것은 조영래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조영래가 평전을 쓴 것이다.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을 자신과 장기표의 공동저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영기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던 중 82년 수배 중이던 민종덕은 다른 수배자들과 인천 구월동 주공아파트에서 함께 살고 있는 돌베개 출판사 편집장 박승옥으로부터 <전태일 평전>을 출판할 의향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일본어판으로 먼저 출판되다

민종덕은 돌베개 출판사의 임승남 사장, 박승옥 편집장을 비롯해 출판사 모든 직원이 <전태일 평전>을 출판함으로써 당국으로부터 받을 어떠한 탄압도 감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자신이 원고 복사본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출판사측의 결연한 의지가 있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저자를 밝힐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를 저자로 할 것인가. 이소선은 조영래가 쓴 이 <전태일 평전>의 존재에 대해 어느 누구한테라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평전을 쓴 사람은 유신독재가 혈안이 돼서 찾고 있는 지명수배자 아닌가.

바로 그 책을 지금 국내에서 출판을 하겠다고 하니 이소선으로서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고민 끝에 묘수를 찾아냈다. <전태일 평전>은 이미 일본에서 일어판으로 출판됐다. 그것을 80년 11월 전태일 추도식 때 처음으로 밝힌 사람이 서남동 목사였다. 그러니 서남동 목사가 번역한 것으로 해서 출판한다면 어떻겠는가 하는 의견이 모였다. 이런 취지의 제안을 서 목사한테 하니 그는 흔쾌하게 허락했다. 그렇게 출판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에 대해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문익환 회장이 다른 의견을 냈다.

"전태일처럼 훌륭한 청년이 우리 민족이라는 데 한없는 자부와 긍지를 갖고 있는데 그처럼 자랑스러운 전태일 평전을 우리나라 사람이 쓰지 못하고 일본 사람이 쓴 것처럼 한다면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수치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 테니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에서 엮은 것으로 하자."

이렇게 해서 <전태일 평전>이 83년 6월 출판돼 세상에 나오게 됐다. 처음에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에 '전태일 평전'이라는 부제목으로 출판됐다. 저자는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엮음'이었다.
이소선은 아무런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다만 마음속으로 저 사람들이 저러다가 혹시 조영래라는 이름을 밝히면 어떻게 하나 조바심이 들고 애가 탔다.

조영래는 47년 대구에서 출생해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법과대학을 수석으로 들어갔다. 대학 재학 중에 같은 법대의 장기표와 함께 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했고, 졸업 역시 수석으로 했다. 사법시험 준비 중에 맞은 전태일 사건을 학생운동으로 사회문제화하고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재학 중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서 수배를 당하게 됐다. 수배 중에도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고, 노동운동·민주화운동에 꾸준히 투신해 왔다.

글쓴이를 밝히지 못하고 출판된 한국어판

이소선이 본 조영래는 언제나 온화한 마음과 말씨로 함께 있는 사람을 더없이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조영래는 사물이나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명확하게 판단하고, 그 일을 확실하게 해결했다. 많이 배우고, 지식도 많고, 머리도 남달리 똑똑한 사람이지만 그는 언제나 약한 자, 억눌린 자의 편에 서는 그야말로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83년 5월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이 출판됐다.

이소선은 아들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것이 번듯한 책으로 출판돼 세상에 나온 것이 신기했다. 무엇보다도 전태일의 진심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책 표지에 실린 사진을 보고 있으니 그때가 바로 지금인 것 같아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앓아 누웠다. 표지 사진은 아들 태일이 장례식 때 자신이 아들의 사진을 붙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태일 평전>은 예상대로 출판되자마자 당국으로부터 즉각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다. 출판기념회도 원천봉쇄를 당한 끝에 약식으로 했다. 책 판매도 서점이 아니라 조직을 통했다.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주관으로 각 운동단체·종교단체·노조에서 조직적으로 판매를 하기 시작했다.

<전태일 평전>의 영향은 대단했다. 전국 각 대학·노동단체·농민단체는 물론 지식인·종교인, 해외에서까지 필독서가 됐다. 그리고 전태일에게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꿔 노동자가 되고, 노동운동·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억압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90년 가을 어느 날 민종덕은 서소문에 있는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조 변호사님, 이제 전태일 평전 저자를 밝힐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민종덕의 말에 조영래 변호사는 그냥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럼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출판사에 연락하겠습니다.”

조영래는 다시 빙그레 웃다가 진지한 얼굴이 됐다.

“전태일 평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 써졌다고 생각하네. 첫째는 지식인의 관점에서 쓰인 것이고, 두 번째는 본의 아니게 죽음을 미화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네. 그래서 지식인이 아닌 노동자가 다시 썼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하네.”

세상 사람들이 <전태일 평전>에 감동하고 찬사를 보낼 때 정작 저자인 조영래는 남몰래 괴로워했다. 특히 전태일 이후 투쟁 현장에서 죽어 간 열사들한테 미안해했다. 그중에서도 박영진 열사를 거론하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민종덕은 즉시 출판사에 전화를 했다. 출판사는 조영래가 저자로 명시된 개정판 인쇄를 서둘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태일 평전> 저자인 조영래는 그 책이 나오기 전인 90년 12월12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개정판은 91년 1월에 나왔다.

너무도 이른 나이에 조영래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소선은 자신의 몸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픔에 몸부림치며 슬퍼했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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