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역사연구가

물가가 내리면 좋을까 나쁠까. 물가가 내리면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 당연히 물가가 내리면 좋지 않을까. 물가가 오르는 것을 인플레이션이라고 하고 내리는 것을 디플레이션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 전 세계가 디플레이션 공포에 바들바들 떨고 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고 2년 뒤에는 유로존 위기가 발생하면서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의 경제가 쑥대밭이 됐다. 과연 글로벌 금융위기는 여기서 끝난 것일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과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물귀신 작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한 핵심 목표는 승자독식이었다. 그로 인해 소득 양극화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뤄졌다. 양극화 심화는 불가피하게 개인과 기업, 국가 차원에서 부채를 크게 증가시켰다. 그 결과 세계경제가 거대한 부채의 연쇄사슬로 형성되면서 부채경제로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부채 규모가 커지자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지면서 대중의 가처분소득이 꾸준히 감소했다. 가처분소득 감소는 소비 축소로 이어졌고 이는 수요 감소로 인해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키웠다.

이미 미국은 1.7퍼센트의 인플레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이다. 유럽에서는 유로화를 쓰는 18개 국가의 2014년 9월 물가상승률이 0.3퍼센트까지 급락했다. 고도성장으로 경기 과열과 소비자물가 급등을 걱정하던 중국과 인도 역시 전례 없는 저인플레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중국의 2014년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6퍼센트였다. 인도는 2.38퍼센트로 떨어졌다.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져 실제로 디플레이션 상황에 들어간 나라도 있다. 스웨덴은 2014년 9월 물가 상승률이 -0.4퍼센트, 10월엔 -0.1퍼센트를 기록했다. 이스라엘 역시 10월에 -0.3퍼센트 보였다.

그렇다면 왜 디플레이션에 대해 이토록 두려워하는 것일까. 디플레이션을 처음 경험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1980년대 부동산 가격 폭등에 극도로 시달림을 겪었던 일본 소비자들은 1992~93년에 이르러 물가상승률이 1퍼센트 수준으로 내려앉자 이를 크게 반겼다. 일본 정부도 크게 개의치 않고 방관했다. 하지만 물가하락은 경기침체가 장기간 이어진 ‘잃어버린 20년’의 출발이었을 뿐이었다.

디플레이션은 일본에서 확인됐듯이 기업 수익을 악화시키고 이는 다시 투자를 감소시키면서 경기 침체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부른다. 그런데 디플레이션이 미치는 가장 치명적인 영향은 부채와 관련이 있다.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서면 화폐가치 상승으로 부채 상환 부담이 증가한다. 부채를 상환하지 못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거대한 부채의 연쇄사슬로 형성돼 있는 요즘 상황에서 경제 전반을 일순간에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요소다. 전 세계가 디플레이션 현실화에 대해 극도의 두려움을 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각국 정부는 디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와 중앙은행이 나서 경쟁적으로 돈을 풀었다. 하지만 효과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 연방준비은행 등 세계 3대 중앙은행이 금융위기 이후 무려 7조달러를 풀었는데도, 경기 활성화는 고사하고 2퍼센트의 물가 상승도 달성하지 못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자본주의는 돈 중심 경제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고, 돈을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며, 돈으로부터 모든 권력이 나오는 체제다. 신자유주의는 돈 중심 경제를 극한으로 몰고 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신자유주의 후과가 거대한 부채의 연쇄사슬을 형성하고 여기에 디플레이션 위험이 가세하면서 세계경제가 언제 파국적 상황으로 치달을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게다가 정부와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다. 돈 중심 경제의 기능이 점차 마비돼 가고 있음을 알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몰락한 신자유주의가 자신의 모체인 돈 중심 경제마저 무덤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은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상황이 심각하다.

1천조원을 훌쩍 넘어선 가계부채는 가처분소득을 감소시키면서 다른 여러 요인과 결합해 지속적으로 시장 수요를 위축시켜 왔다. 그에 따라 디플레이션 위험성이 커졌다. 정부 관계자도 이 점을 인정했다. 예컨대 2014년 8월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어느 포럼에서 “한국이 디플레이션 초기에 와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5년차 정도에 진입한 것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의 60% 정도가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부가 돈을 풀어도 돈이 돌지 않는다는 것이다. 효과가 없다는 얘기다. 한국 경제가 언제 어떻게 파국으로 치달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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