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줄타기
글쓴이 : 박인상ㆍ박미경
펴낸곳 : 매일노동뉴스
발행일 : 2009.12.04
페이지 : 419
ISBN : 9788995499030 | 판형 A5, 148*210mm      

      

 

 

『외줄타기』는 노동운동 40년, 저자 박인상의 회고록으로 국내 최초의 노동운동가 회고록이다. 박인상 위원장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을 담았다.

책소개

“임시공 1천명이 아니라 가족까지 5천900명이 죽는 겁니다”

○ 1968년 11월29일 오후 대한조선공사는 임시공(비정규직) 1천175명 전원에게 해고예고통보를 했다. 조합원 2천여명, 본공(정규직)과 임시공이 하나가 돼 아우성을 쳤다. 당시 사진을 보면 다들 새까맣고 광대뼈가 툭툭 불거질 정도로 깡마른 데다 남루하기 짝이 없는 작업복을 입고 있다. 모기소리조차 낼 힘도 없어 보이는데 무슨 기운으로 하루 종일 소리를 질러대고 쉴 새 없이 연설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내 눈에 비친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똑똑하고 용감한 노동자들이었다.(회고록 43-44쪽)

○ 파업 15일째 되던 날 마지막 승부수를 꺼내 들었다. 우리는 조합원들과 함께 굶어 죽기로 했다. 단식농성이다. 추위 속에 단식 이틀째가 되자 쓰러지는 조합원들이 생겼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앰뷸런스가 탈진한 조합원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이불을 전해 주러 공장에 들어왔다가 이 광경을 보게 된 가족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내 남편, 내 자식 살려 내라’며 도로를 점거했다.(회고록 46-48쪽)

○ 단식농성 3일째, 마침내 남궁련 사장이 영도경찰서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회사로 들어왔다. 사장실 문을 걸어 닫았다. 협상이라고는 하지만, 사장이 회사에 모습을 드러낼 때 이미 노조의 승리는 예고돼 있었다. 임시공 해고예고 철회를 포함해 사장은 노조의 모든 요구를 수용했다. 사장은 본관으로 향했다. 나는 마이크를 사장에게 들이댔다. 사장의 입에서 합의사항이 한 구절 한 구절 나올 때마다 가족들은 함성을 질렀다.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다.(회고록 48-49쪽)

이것은 ‘복수전’인가 ‘말살전’인가

○ “봐라. 인상아 이기 뭔 소리고?” “함 보입시더. 긴!급!조!정!권?” 보사부장관 명의의 긴급조정권이었다. 전날인 1969년 9월17일 회사는 지부 간부 16명을 해고한다는 공고를 붙였다.(회고록 133쪽)

○ 1969년 9월24일 중앙노동위원회가 주재한 긴급조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우위를 점한 회사는 큰소리를 쳤다. 회사는 아무런 안을 내놓지 않았다.(회고록 137쪽)

○ 추석 연휴가 끝난 뒤 지부 간부·핵심 조합원들 20여명이 국제시장 안에 자리한 한 여관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어느날 순식간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런데 여관방으로 들어온 형사들은 우리 얼굴이나 행색을 보는 게 아니라 방석을 들춰보고 옷장을 뒤졌다. 도박을 단속하러 나온 중부경찰서 형사들이었다. 십년감수한 우리는 줄행랑을 쳤다.(회고록 140-141쪽)

○ 피신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노조 두 곳에 전화를 걸었다. 웬걸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꼼짝없이 잡혀 영도경찰서로 갔다. 지부 간부들 대부분이 잡혀 와 있었다.(회고록 141쪽)

○ 본공과 임시공을 하나로 묶어 여섯 번 싸워 여섯 번 모두 이겼던 조공지부의 신화는 이렇게 무너졌다. 남은 사람들은 기나긴 침묵의 시간 속으로 빠져 들었다.(회고록 142-143쪽)

열여섯 나의 꿈, 대학생을 꿈꾸는 노동자

○ “야 인상아. 인마! 뭔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노?”
“….”
“진주사범에 떨어지더만, 야가 아주 넋이 나가삣네.”
"고만하이소.“
와룡산에 올라 함께 나무하던 병수 형은 안다. 열여섯 소년에게 이곳이 얼마나 답답한 곳인지. 경남 사천군 용현면 주문리 신평마을. 진주사범에 낙방한 뒤 나에게 주어진 길은 아버님과 형님을 따라 농사를 짓는 것뿐이었다.(회고록 87-89쪽)

○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란이 일어났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난리가 터진 지 한 달이 채 못돼 인민군이 들어왔다. 인민군 6사다나 방호산 부대라고 했다. 우리 마을에 머물렀던 기씄는 한 달 정도였다. 나 씙는 꼬맹이들은 마을회관에 불려 가 노래를 배웠다. 어린이야 노래만 불렀지만 어른들은 어디 그랬을까. 난리 통에 우리 집은 그나마 있던 땅도 팔아야 했을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9남매의 막어야 나를 고등학교까지 공부시킨등학교에는 엄두도 못 낼 일이 돼 버렸다.(회고록 93쪽)

○ 1956년 부산영도에 있는 대한조선기술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아버님은 국가에서 학비를 대 준다니까 반대하지 않으셨다. 어머님은 부지런히 배우라고 하셨다. 나는 땅에 묶여 있고 싶지 않았다. 대처로 나가고 싶었다. 농사짓는 것보다는 공부하는 게 훨씬 더 선택의 기회가 많을 것 같았다. 나는 영도다리를 오가며 여명학원에 다녔다. 대학생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며….(회고록 94쪽)

○ 조선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59년 나는 성적 우수자 3명에 포함돼 조선공사 설계직으로 발령받았다. 퇴근하면 바로 학원으로 달려갔다. 대학이 눈앞에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나의 대학 진학을 반대했다. 셋째형이 대학에 다니는데, 나까지는 도저히 어렵다는 것이었다. 우선 돈부터 모으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잔업과 철야를 할 수 있는 산소공장으로 옮겼다.(회고록 105-107쪽)

산소통 폭발, 산재사고를 겪고

○ 자정을 넘어 크리스마스 새벽이었다. 해방과 함께 들어온 미군은 우리나라에 그들의 명절도 선물했다. 나는 산소엔진룸에서 철야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소용기의 압력이 시간이 지나도 내려가지 않았다. 엔진룸에서 나와 보니 일정한 압력이 되면 산소통을 잠가야 할 담당자들이 자고 있는 게 아닌가. 동료들을 깨우지 않고 산소용기실로 들어갔다. 첫 번째 산소통을 만져 보니 따뜻했다. 산소가 많이 들어간 것이다. 두 번째 산소통을 만지는 순간 불꽃이 확 일었다. 옷에 불이 붙었다. 주저앉아 불꽃으로부터 얼굴을 막았다. 다시 일어서려는데 다른 산소통의 밸브들이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산소통을 막고 있던 밸브의 파편들, 쇳조각들이 반대편 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만약 일어었더라면…. 아찔한 순간이었다.(회고록 108-109쪽)

○ 천만다행으로 화염을 깊게 마시지 않아 내상은 없었다. 팔에는 큰 상처를 입었다. 다리의 피부를 이식해야 했다. 영도에 있는 장외과에서 두 달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가족들이 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큰형님이 오셨다. 큰형님 하시는 말씀이 ‘집에 소가 죽었다’고 했다. 내 몸 상태는 묻지도 않고 죽은 황소 이야기부터 하시는 게다.(회고록 109-110쪽)

○ 4월혁명으로 고향 집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 해 12월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큰형님이 민주당 사천군 용현면 면의원 후보로 출마해 최다 득표로 당선되셨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예정돼 있던 군 입대를 할 수 있었다.(회고록 113쪽)

뿔뿔이 흩어진 ‘황야의 11인’

○ 1969년 10월1일. 우리가 잡힌 날은 하필이면 국군의 날이었다. 나를 포함한 조공지부 간부 11명은 폭행‧기물파손‧업무방해‧폭언 등의 혐의로 구속돼 부산 대신동에 있던 부산교도소로 보내졌다.(회고록 146쪽)

○ 우리가 구속되자 가족들이 나섰다. 부인들이 적극적이었다. 주동자는 내 아내였다. 내 아내 김성자는 일등 신붓감이었다. 대한조선공사 기획실에 근무하던 아내는 회사 대표로 뽑혀 배 진수식에서 밧줄을 손도끼로 찍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회고록 150쪽)

○ 1970년 3월14일. 1심 판결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은 허재업 지부장만 빼고 나머지 10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나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고등법원에 항소해 몇 달 뒤 무죄를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그러기까지 3년이 걸렸다.(회고록 162-163쪽)

○ 나는 교도소를 나와 사무실을 차렸다. 고려은단주식회사 부산총판. 먹고살기가 막연해 친지들에게 사업자금을 빌려 사업을 시작했다. 내 사무실이 제2의 조공지부 사무실이 됐으니 담뱃값이며 밥값이 만만치 않았다. 이러다 사업자금 다 까먹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을 무렵, 권오덕이 찾아왔다. “이래 끝낼 수는 없다 아이가!” 맞는 말이었다. 어느 하지만 어느 공장에서 우리를 받아 줄 것인가…. “철공소가 있다 아이가!”

DJ 살리려 애쓰던 일본 노동조합 간부들

○ 1970년 가을, 나는 다시 노동자가 됐다. 대평철공소에 입사해 금속노조 직할 영도철공분회 사무장을 맡았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영도의 철공소들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합원을 조직하는 첫걸음이다. 우리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철공소를 돌며 사장을 상대로 “근로기준법을 지켜야 한다”고 설득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몰아세우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청계피복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분신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회고록 170-174쪽)

○ 1975년 내가 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 사무장을 할 때다. 일본 조선중기노련 중앙위원회를 참관했다. 1969년 조공지부 간부들이 구속됐을 때 국제자유노련 일본협의회가 성금을 보내 준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 협의회 소속이던 조선중기노련 간부들이 몇 명 남아 있었다. 나를 보고는 정말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화제로 올랐던 것은 당시 야당 지도자로 군사정부에 체포된 김대중씨였다. ‘광주’와 ‘김대중’이 연일 일본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을 때였다. 일본 노동조합 간부들은 “한국 정부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분노를 표출했다.(회고록 226쪽)

“금속노련 위원장 박인상입니다”

○ 1985년 금속노련 임원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위원장 후보는 금속노련 위원장이었던 팽종출씨, 금성사 출신의 민정식씨, 나 이렇게 3명이었다. 나는 돈이 없었다. 보통 선거캠프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접대를 받고 가는 게 일반적인 경우였는데, 우리 캠프(백궁장 여관)는 방문한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돈을 내놓고 갔다.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백궁장에 있는 우리 캠프는 돈이며 표며 백 가지가 궁하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나는 당시 선거운동 과정에서 이석행 대동중공업노조 위원장과 문성현 통일중공업 사무장을 만났다. 이들은 새 시대를 여는 사람들이었다.(회고록 249-251쪽)

○ 선거가 있기 하루 전날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표라고 세어 놓았던 대우자동차의 표가 우리 게 아니었다. 급하게 노조위원장을 만났다. 그는 나를 도와줄 테니 금속노련 위원장에 당선되면 한국노총에서 한 인사를 내쫓아 달라고 했다. 나는 긴말하지 않고 한마디를 던지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런 표 필요 없다.”(회고록 253-254쪽)

○ 결국 우리는 졌다. 10표차였다. 참모들은 결과에 실망하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나는 단상 위로 올라가 민정식 후보의 손을 번쩍 들었다. “여러분이 선택한 후보입니다. 오늘 당선되신 민정식 위원장을 중심으로 앞으로 3년 동안 열심히 해 나갑시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회고록 256쪽)

○ 1988년 5월27일. 마침내 금속노련의 깃발을 움켜쥐었다. 나는 바둑판부터 치웠다. 간부들에게 기관원과 어쩌다 어울리게 되더라도 막걸리나 소주 이상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모토는 ‘현장 중심주의’였다. 나는 전국을 돌고, 또 돌았다. 간부들에게도 무조건 현장으로 가라고 했다. 이제까지 내 경험에 비춰 보면, 현장은 노동조합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조직‧정책‧자금 그리고 민주주의까지…. 이 모든 것들이 조합원들이 있는 현장에서 나왔다. 금속노련 위원장 3선, 한국노총 위원장 2선,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내가 지킨 ‘조합원 중심주의’의 바탕이 됐다.(회고록 277-281쪽)

출판사 서평

국내 최초의 노동운동가 회고록!

빈농의 자식에서 조선소 노동자로,
산소엔진룸 폭발사고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비정규직(임시공) 1천여명 전원해고에 맞서 1968~69년 부산 영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파업 주도, 사상 최초 긴급조정권 발동, 금속노련 위원장 시절 한국노총 최초의 옥외집회 개최, 한국노총 위원장 시절 50년 만의 총파업 단행, 정책연합을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노사정위원회 설립 합의, 위암 수술 뒤 16대 국회의원 당선, 국제노동협력원 운영위원장으로 노동외교에 매진…

박인상 위원장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 정말 사랑했던 아우들, 함께하고 싶었던 아우들이 전노협으로 민주노총으로 떠나간 그 자리에서, “그래, 가서 잘해라”는 말을 하시면서 형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중략) ‘비정규노동운동본부’를 만들고 박인상 형님이 본부장을 맡고, 내가 부본부장이 되는 꿈. (중략) 이제 같이 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자면 ‘노동자 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은 청년 박인상이 시작했던 투쟁,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하는 투쟁이다.(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 추천사 중에서)

○ 노동운동 40년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주변사람에게 교훈을 주며 쌍방향 소통으로 일관해 온 박인상 위원장의 회고록은 후배 노동운동가들의 필독서이자 한국 현대사의 노동운동에 대한 기록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 추천사 중에서)

저자 소개

박인상

한국 노동운동의 대부. 노동조합 활동을 그만둔 지 꽤 됐음에도 언제나 ‘영원한 위원장’으로 불린다. 1939년 12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물리쳤던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났다. 비정규직(임시공) 신분으로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 청년부장을 맡으면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 후반, 임시공 집단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국내 최초의 국영기업 파업을 이끌었다. 금속노련 위원장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개혁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재도전 끝에 위원장에 당선됐다. 1996년 한국노총 위원장에 당선된 뒤에는 민주노총과 연대투쟁을 성사시켜 96~97년 노동계 총파업을 이끌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제16대 국회의원(환경노동위원회)에 당선됐다. 해마다 의정활동 베스트 국회의원에 뽑히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현재 국제노동협력원에서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박미경

일하는 사람들이 웃고 우는 공장이 몰려 있는 곳,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마산 MBC에서 시사 문제를 다루는 구성작가로 일했다. 서울에 올라와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 세상을 꿈꾸다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 보려는 마음에 <매일노동뉴스>로 옮겼고, 노동자의 삶의 애환과 꿈을 들려주는 인터뷰 기사를 연재했다. 현재 <매일노동뉴스>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외줄타기’ 붓글씨를 써 주신 이병진 선생은 원광대․우석대 강사로 활동했으며 한국서예대전ㆍ전북도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눈 그림 600년전, 새천년 릴레이전, 한중ㆍ한일 교류전에 작품을 출품한 바 있다.

 

 

목차

● 추천사
사람을 사랑한 영원한 위원장 4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
다시 하나됨을 꿈꾸며 7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
● 프롤로그
회고록 발간에 부쳐 12

Part 1
노동자는 하나, 본공과 임시공을 하나로 묶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파업 22
임시공들, 조합 속으로 들어오다 32
완벽한 승리, 그 앞에 놓인 것은? 42
‘레프트 두목’ 52
“노동조합 간부를 맡으라꼬요?” 62
노동조합은 나의 노동대학 73

Part 2
최초의 긴급조정권 발동,
빼앗긴 노조 무너진 신화
열여섯, 나의 꿈 86
조선기술고등학교, 그리고 여명학원 96
대학생을 꿈꾸는 노동자 105
“또 붙자! 싸우면 우리가 이긴다!” 114
이것은 ‘복수전’인가, ‘말살전’인가 123
칼 빼든 정부, 최초로 발동된 긴급조정권 133
Part 3
암흑의 시대, 꺼지지 않는 공장의 불빛
뿔뿔이 흩어진 ‘황야의 11인’ 146
나의 반쪽을 만나다 156
금속노조 직할 영도철공분회 사무장 166
“지역지부로 다들 뭉칩시다!” 177
처음으로 조직의 ‘쓴맛’을 보다 189
늘어나는 조직, 때를 기다리는 노동자들 200

Part 4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무나 짧았던 봄 216
‘조직’은 못하고 ‘교육’만 하는 신세 230
10표차, 개혁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244
불붙은 노동자대투쟁 258
“금속노련 위원장 박인상입니다” 270
부당노동행위를 막아라! 284
눈앞에 다가온 ‘복수노총’ 시대 296

Part 5
외환위기와 정책연합,
그리고 50년 만의 정권교체
한국노총 위원장이 되다 312
현장이 바로 서야 한국노총이 산다 321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않는다 330
공포됐던 법률이 국회에서 재개정되다 340
‘정책연합’을 둘러싼 갈등 351
“모든 것을 노사정위에서 다룹시다” 359
피해 갈 수 없었던 파도, ‘정리해고’ 369

Part 6
원치 않았던 여의도행, 다시 늙은 노동자로
“국회로 와서 정부를 도와주십시오” 382
“할 말은 하겠다” 394
늙은 노동자들 곁으로 406

● 에필로그
금속노동자에서 이주노동자의 친구로 416
● 연표로 보는 박인상의 생애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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