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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69]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청계피복노조가 강제로 해산당하고, 아시아아메리카자유노동기구(아프리)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속·수배된 상태에서 세상은 어둠 같은 침묵만 짙게 깔려 있었다.

1981년 11월13일 전태일 11주기 추도식이 다가왔으나 그동안 전태일 추도식을 주최해 왔던 청계피복노조가 해산된 상황에서 추도식을 주최할 만한 단체가 없었다. 그래서 유가족과 구속자 가족·조합원 그리고 재야인사 몇 분이 함께 추도식을 거행하게 됐다. 비록 초라하게 치러진 추도식이었지만 참석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각오와 결연한 의지로 전태일의 뜻을 실현하리라 다짐했다.

비장한 각오로 치른 전태일 11주기

신군부는 청계피복노조를 필두로 반도상사·서울통상·태창섬유·남화전자·무궁화메리야스노조 등 70년대에 건설된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불법·부당한 만행을 계속했다.

신군부 독재정권은 81년 7월 콘트롤테이타노조를 파괴했다. 콘트롤테이타는 다국적 기업으로서 그동안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다 마침내 공장철수를 단행함으로써 노동자들을 해고시켰다. 이에 콘트롤테이타노조는 공장철수 반대와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투쟁했다.

그러나 정작 자국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할 우리나라 노동부는 콘트롤데이타 해고자를 복직시키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노동자 50여명은 노동부에 찾아가 항의농성에 돌입했다. 그러자 경찰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농성 노동자 전원을 연행하고 그중 3명을 구속했다.

70년대 대표적인 민주노조 가운데 하나인 원풍모방노조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숨통을 조여 왔다. 지부장과 부지부장을 정화해고(노조 직책 사퇴와 해고)하고 상집위원과 대의원을 연행해 강제로 사표를 받았다. 노동부는 법률적 근거도 없이 통합을 종용하는 등 온갖 탄압을 자행했다. 마침내 82년 9월27일 정체불명의 구사대 100여명이 노조사무실에 난입해 노조 간부와 조합원들을 사무실 밖으로 끌어내고 사무실 기물을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조합 간부가 정신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현장에 남아 있던 650여명의 조합원들은 "폭력배 물러가라", "노동조합 사무실 돌려 달라"고 외치며 투쟁하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10월1일 새벽 회사 정문에서 농성하던 중 전투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모두 끌려나왔다. 이렇게 해서 70년대 민주노조는 원풍모방을 마지막으로 단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됐다.

신군부 정부는 민주노조를 완전히 파괴하는 등 노동운동을 압살했다. 82년에는 전년 대비 노사분규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자랑했다. 83년 초에는 노사분규가 발생하는 사업장에 즉시 개입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70년대 민주노조 간부 출신들은 구속·수배·정화·삼청교육·해고 등으로 엄청난 좌절과 분노를 되씹어야 했다. 모두들 생활과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이런 처지에서 70년대 민주노조 간부들은 서로 만나기 시작했다. 만나서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지독한 외로움을 달래면서 앞날을 기약했다. 이들은 해고자라는 뜻을 상징하는 '고자모임'이라는 자조 섞인 이름으로 만나 관악산을 등산하면서 쓴 소주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달랬다.

이처럼 폭압적인 노동운동 탄압 속에서도 재야 민주인사들은 어떻게 하면 노동운동의 불씨를 꺼지지 않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특히 전태일 추도식에 참가한 재야인사들은 아프리 사건으로 구속된 청계피복노조 이소선·황만호·전태삼·김영대·박계현·김성민·임기만·이덕곤·문숙주 등 11명이 너무나 가혹한 형벌을 살고 있는데도 그들을 위한 구명운동이나 지원활동이 미흡하다고 지적하고, 구속자들을 위한 기구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몇 번의 모임을 거쳐 마침내 81년 12월14일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전태일기념관 건립위는 당국으로부터 탄압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겉으로는 전태일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모금활동을 하는 것으로 표방했다. 실제 활동 내용은 구속자 석방운동을 지원하고 노동자들이 모일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청계피복노조 재건을 지원하기로 했다.

전태일기념관 건립위를 발족시킨 인사들은 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이우정(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장)·이창복(전 국회의원)·김동완(목사 전 NCC 총무)·이길재(전 국회의원)·김창국(전 상지대 총장)·정인숙(전 민주노총 여성노조 위원장)·윤순녀(전 노동사목회장)·정양숙(전 가톨릭노동청년회장) 등으로 신·구교 인사들과 재야인사·노동운동가들이 망라됐다.

전태일기념관 건립위 회장으로는 공덕귀 여사가 선출됐다. 공 여사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 윤 전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정권 내내 반정부·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활동했다. 공 여사는 7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이소선과 두터운 신뢰와 친분을 쌓았다. 77년 이소선이 첫 번째 구속됐을 때 공 여사는 노동교실을 직접 방문해 구속에 항의하다 경찰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공 회장을 중심으로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는 모금활동을 벌였고, 구속노동자들을 위한 기도회와 면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출소했지만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이소선

81년 말에 만기 출소한 이소선은 심신이 매우 지쳐 있었다. 그렇다고 맘 편하게 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우선 당장 급한 대로 어린 손자 손녀를 살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래서 며느리와 신당동 중앙시장에 나가 헌 옷을 사다가 세탁해서 파는 일을 시작했다.

중앙시장에 나가면 헌 옷을 수집해 오는 고물장사가 있었다. 그 장사치한테서 옷을 사서 깨끗하게 세탁한 뒤 수선해서 파는 것이다. 이소선은 이 장사를 오래전부터 해 왔다. 청계피복노조 초창기에도 이 장사를 해서 노조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헌 옷 장사에서 이문을 많이 남기는 것은 죽은 사람 옷을 수집해 와서 깨끗이 빨아 파는 것이다. 이소선은 낮에 죽은 사람 옷을 수집해 와서 밤새도록 며느리와 함께 손빨래를 해서 널어놓았다가 다음날 다 마르면 깨끗이 다려서 내다 팔았다.

며느리는 낮에는 삯바느질을 해서 마련한 돈으로 틈틈이 감옥에 있는 남편 전태삼을 면회했다.

이소선은 아들 태일이의 목숨과 바꾼 청계피복노조도 해산되고, 수많은 조합원들이 구속된 상태에서 집안 형편까지 엉망이 된 것을 볼 때 마음이 허했다. 헌 옷 장사를 해서 집안을 어느 정도 수습해 놓으니 허한 마음이 더했다. 집안에서 손자 손녀 돌보며 평범하게 사는 것은 징역살이보다 더 힘든 것 같다.

이소선은 그동안 노동운동을 하느라 소홀했던 교회를 열심히 나가기로 했다. 그동안 믿는 자로서 교회 다니는 것을 소홀했던 것을 반성하고 교회에 다시 다니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다닐 교회가 마땅치 않았다. 아들 전태일이 죽었을 때 장례식을 치러 줬던 교회는 자신이 노동운동 한다는 이유로 말도 되지 않는 모함을 했던 터라 다닐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창동교회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 직분인 권사로서 부끄럽지 않은 신앙인으로 거듭난다는 각오로 교회를 다니고, 흐트러진 가정을 일으켜 세우는 데 마음을 쏟았다.

이소선은 가정을 추스르고 교회에 다니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마을에서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은 이소선을 찾아와 의논하고 일을 해결해 달라며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식량이 떨어진 집에서 하소연하면 이소선이 나서 동사무소에 가서 밀가루라도 타 왔다. 의지할 곳 없는 이웃주민이 상(喪)을 당하면 염습(殮襲)을 직접 해 줬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과 한집안처럼 지내게 됐다. 마을 사람들은 이소선을 집안 어른처럼 여겼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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