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냉장고를 열다가 문득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의미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한자 숙어가 떠올랐다. 김치냉장고야말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어느 기업에서 김치를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특수냉장고 개발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시험용으로 사용된 김치만도 자그마치 100만 포기가 넘었다. 결국 연구진이 깨달은 것은 김치냉장고 제작기술의 모든 비밀은 조상들이 땅에 묻었던 김칫독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정치인들이 유권자를 유혹하기 위해 꺼내 들었던 ‘증세 없는 복지’는 예상했던 대로 오래지 않아 그 허구성이 들통나고 말았다. 여론의 중심축은 복지 확대를 위해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증세만으로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증세 논쟁은 불가피하게 모든 국민이 더 많은 복지를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는 경제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로 관심 영역을 확장시킬 것이다. 말하자면 증세 논쟁을 매개로 대안 경제모델 논쟁이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이와 함께 초고령화의 진전으로 복지 수요가 갈수록 증가하는 조건에서 새로운 시대 상황에 맞는 복지 개념의 모색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자칫 조세 부담 능력이 있는 한 명의 젊은이가 세 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재정만으로는 노인 복지를 감당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시대 향약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지역 자치공동체로서 향약은 세계 역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정연한 체계를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향약은 봉건 질서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권한을 갖고 발언하고 대표자를 선출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평등하고 민주적인 공동체였다.

향약은 평등사회를 의미하는 대동사회(大同社會) 건설을 이념으로 삼았다. 이는 다시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 등의 자치 규약으로 구체화됐다. 이 중에서 오늘날 지역사회복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환난상휼은 공동체 성원들이 철저한 무보수 원칙에 입각해 어려움을 함께 나눴다.

향약 공동체에서 기본 단위를 이룬 것은 대가족이었고 리더십을 발휘한 집단은 바로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은 대가족 단위로 보육과 교육, 건강관리 등을 책임졌다. 또 협동노동을 지휘·감독했고, 관혼상제 등 공동체 문화를 주관했다.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도덕률을 확립하는 것도 노인들의 몫이었다.

향약 공동체에서 노인들은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는 단순한 부양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엄밀히 말해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지도 집단이었다. 노인들의 한마디가 곧 법이고 명령인 사회였던 것이다. 경로사상이 특별히 강조됐던 것은 그러한 공동체의 지도력 확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우리는 향약의 운영원리를 바탕으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오늘날 환경에 맞는 지역사회복지 모델을 구상할 수 있다. 지역사회복지 모델은 정부 재정에만 의존하는 기존 국가주의 복지모델과 비교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지역사회복지 모델은 구성원을 복지의 대상이자 동시에 주체로 간주한다. 노인들은 의료와 교육 등 복지 분야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실제 일부 지역에서 보육기관과 노인복지기관을 나란히 건립한 뒤 노인들이 보육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노인과 어린이 모두가 만족하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둘째, 지역사회복지 모델은 정부 재정이든 연기금이든 돈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자원봉사와 상호부조에 의한 해결을 강조하며 물질적 지원 못지않게 공동체적 인간관계 회복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을 중시한다. 그 결과 복지비용이 크게 절감되면서도 한층 높은 질의 삶을 보장할 수 있다. 최소의 비용으로 따뜻한 피가 흐르는, 저비용 고효율 복지 모델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셋째, 지역사회복지 모델은 정부 기구 못지않게 비정부·비영리 기구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박은 비정부·비영리 조직의 활동은 나날이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복지 요구를 자율적이면서도 기동성 있게 해결하는 데 매우 유리하다.

일부 정치인들은 지역사회복지 모델이 정부의 역할 방기를 합리화할지 모른다며 경계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역사회복지 모델이야말로 오늘날 대세가 되고 있는 정부와 지역사회의 협치(거버넌스)를 구현해야 할 대표적인 영역이 아닐까. 조세 정책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에만 집착하는 일부의 모습이야말로 장기적 비전이 없는 근시안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