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졸업 시즌이 겹친 명절 연휴를 보냈다. 어렸을 적부터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온 사촌동생들의 소식을 확인하고서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동갑내기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른 길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12년의 시간을 무탈하게 버텨 낸 것만으로도 격려받아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오가는 덕담 속에서도 내 마음은 영 편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소위 서울 명문대 어문계열에 진학하게 됐다. 그의 합격이 확정된 후 가족들 사이에서는 한 차례 메시지가 돌았다. 원하던 결과를 애써 얻었으니 다들 기쁜 마음이었다. 대학의 등급으로 그간의 모든 성과를 평가받는 경쟁체제 속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을까.

다른 한 사람은 특성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취업했다. 공업고에서 건축디자인과를 전공한 그의 방에는 실습수업의 흔적으로 정교하게 잘 그린 건축도면들이 붙어 있었는데, 문외한의 눈에도 꽤 좋은 솜씨였다. “게임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농담을 던지면 돌아오는 쑥스러운 반응에 나름의 자부심도 느껴졌다.

그가 학교 알선으로 취업한 곳은 40명 규모의 중소규모 간판제작업체였다.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까. 취업경로부터 직무의 내용, 급여와 근로시간 등 노동조건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근로계약서는 썼는지, 혹시나 노동관계법령을 위반한 사항은 없는지 확인했다. 월급 120만원,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 일자리. 건축디자인을 배웠으나 회사에서 하는 일은 간판을 제작하는 업무였다. 건축디자인과 괜히 갔다는 투정으로 대화는 끝났다.

명절 때마다 마음 잘 맞는 동갑내기로 쏘다니기 바쁘던 두 사람이 20세의 청년으로 사회에 나서면서 다른 출발선에 섰다. 이들의 노동생애는 각각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까. 무엇이 더 나으리라고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문득 완전히 다른 시나리오 전개를 미리 예상해 버린 내 스스로가 야속했다.

최악의 청년실업으로 고학력 실업자가 넘쳐나는 세상에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은 괜찮은 일자리를 향한 경쟁에 나설 최소자격을 부여할 뿐이다. 이 경쟁에서도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편 고졸 취업을 통해 노동시장에 조기에 진입하면 산업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숙련과 경력을 통해 장기적으로 노동시장에서의 성과가 더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묻지마 취업’과 다를 바 없이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로 첫발을 내디딘 현실에서, 그 굴레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최근에 청년에게 필요한 새로운 노동시장정책의 이론적 바탕으로 이행노동시장 개념에 주목해 왔다. 교육·훈련 단계에서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는 최초의 ‘이행’을 ‘더 좋은 이행’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요구해 왔다. 특히나 미숙련 상태와 짧은 경력으로 인해 지위가 취약한 청년들이 겪게 되는 이행을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수반하는 위험을 사회가 어떻게 공동으로 분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워 왔다.

한국 사회에서 공식교육과 노동시장 사이의 제도적 교량은 너무나 취약하다. 디딤돌은 가라앉고 사다리는 끊어져 버렸다. 직업능력을 ‘스펙’이 대체했다. 청년들은 엄청난 고비용을 들여 스펙경쟁에 나서지만 정작 결과는 좋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정부가 직업능력중심사회를 목표로 일·학습병행제와 직업학교 등 이원화 교육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국가직무능력표준의 개발·강화에 나선 것은 중장기적으로 꼭 필요한 방향이다. ‘고학력’에서 ‘고능력’으로, ‘스펙’에서 ‘숙련’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민간 산업생태계가 괜찮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때에만 진짜 의미가 있다. 임금격차를 줄이며 일자리 질을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 대책 없이는 어떤 정책적 조치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

정책에 앞서 사람이 있다. 저 두 사람의 삶을 계속 응원할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얼마씩의 현금을 졸업선물이랍시고 건네는 것이 전부였지만, 두 사람의 노동이 더 행복한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을 위한 싸움을 하고 싶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scottnearing87@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