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오
변호사
(금속노조 법률원 경남사무소)

2009년 10월20일. 경남의 한 조선소에서 도장(painting) 일을 하던 노동자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선박 내 탱크 안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탱크 안은 암실(暗室) 같은 곳이어서 작업을 위해서는 빛이 필요했다. 원래는 가스 폭발 위험성이 있는 곳에서도 안전하게 쓸 수 있게 만든 조명등인 방폭등(防爆燈)을 써야 하는데, 조선소에서는 단순한 수은등만 사용하고 있었다. 화재 발생 이후 발견된 것은 표면이 뚫린 수은등이었다. 수은등이 깨지면서 스프레이 작업을 하던 탱크 안에서 열원(熱源)이 된 것은 아닌지 추정된다.

정확한 화재 원인은 알 수 없다. 다른 열원에 의해 화재가 발생하면서 수은등 표면이 뚫렸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도장작업을 하는 인근에서 용접작업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컨대 열원이 있어서는 안 되는 탱크 안에 산소화기작업에 의한 불꽃이 떨어져 들어가 순식간에 폭발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고 직후 탱크 인근에서 용접작업을 하는 사람을 봤다는 목격자가 나왔다. 목격된 장소에서 탱크 안으로 불꽃이 튀어 들어갔을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노동자는 무려 253일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은 순전히 운(運)이었다. 몸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들이 남았다. 20대에 시작한 조선소 도장일이었다. 제법 숙련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느끼던 30대 초반의 노동자는 작업마스크를 쓴 얼굴을 제외한 채, 땀구멍이 사라지는 화상을 당했다. 이젠 정신적 충격으로 더 이상 조선소에서 도장일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회사측은 두 번째 사고 원인으로 주장된 용접작업시 불꽃에 대해서는 그 목격의 신빙성이 떨어지고, 불꽃이 탱크 안으로 반드시 들어갔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능성만으로 손해배상이 인정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사고 원인으로 제기된 수은등은 자신들이 설치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방폭등을 달지 않고 수은등을 단 것은 노동자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회사는 노동자가 조선소 정규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다.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는 조선소에서 도장을 하는 하청업체가 도급계약서를 작성한 사람으로부터 임금을 받는 자였다. 회사 조선소의 입장에서는 을(乙)의 을(乙)의 근로자였던 것이다.

회사는 을과 체결한 도급계약서를 내밀었다. 을이 안전사고 내지 교육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었다. 을인 하청업체가 자신의 을과 체결한 도급계약서도 들이밀었다.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안전교육과 지시에 대한 책임을 하청업체의 하청업체가 지도록 명시돼 있었다.

물론 도급계약서에 기재된 문구만으로 재판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법원은 스프레이 작업시 문제 여부 확인 등을 소홀히 했다는 점을 전제로 조선소 회사와 그 하청업체가 손해배상을 하라는 취지의 화해권고결정을 내렸다.

문제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한 을의 을이 노동자의 형이었다는 점이다. 형도 피재 노동자와 똑같이 도장일을 하는 노동자였다. 그럼에도 하청업체는 그의 부인에게 사업자등록을 하게 한 뒤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형의 부인은 도장일을 전혀 모르는 가정주부였다. 조선소는 법에 따라 동생에게 손해배상을 해 줬지만, 노동자의 형수에게는 사업자로서 위 도급계약에 따라 손해배상의 일부 또는 전부를 부담해야 한다며 구상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실질에 부합하지 않는 가짜 계약서가 범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질적인 사용자로서의 법적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책임은 아래로 향해 결국 노동자인 동생과 명목상 사업자인 형에게 내려오고 있다. 우리 사회도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과 같은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청·도급계약으로 실질적인 책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방책이 필요하다. 언젠가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죽지는 않았으니까요”라는 젊은 노동자의 웃음소리에 “그래요. 다행입니다”라고 따라 웃었다. 하청도, 위험도, 심지어 죽음까지 범람하는 그곳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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