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거주하는 중국 국적 동포인 조선족은 얼마나 될까. 지난해 12월 말 현재 60만7천명에 이른다. 방문취업 비자제도가 도입된 2007년 32만8천명에서 두 배 늘었다. 조선족을 접할 수 있는 곳은 주로 식당이나 농촌, 건설현장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선족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중국에 200만명이 넘는 조선족이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어떻게 정든 고향을 떠나 척박한 땅 만주에서 살아왔나.

시인이자 르포작가인 박영희씨가 만주의 조선족 13명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가 지난해 말 펴낸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사진·삶창·1만4천원)에는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조선족의 척박하지만 따뜻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만주는 중국 길림성(지린성)·요녕성(랴오닝성)·흑룡강성(헤이룽장성)을 말한다.

식민지 고국 떠나 만주에서 풍파를 겪다

경남 창원을 떠난 황해수씨의 일가족이 압록강을 건넌 때는 1927년이었다. 흑룡강성 하동촌에 자리를 틀었다. 고국을 떠난 이주자들의 실상은 처참했다. 아버지가 풍토병으로 돌아가시고 토비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황씨는 만주국 수도인 길림성 장춘으로 이사했다. 일본군이 진을 친 이곳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피땀 흘려 키운 곡물을 소작료로 냈고 '대동아성전'이라는 명목으로 일제에 공출을 바쳐야 했다.

해방 뒤 중국 현대사에서도 그들의 시련은 계속됐다. 장춘에는 소련군이 입성했다가 중국 내전이 재개되면서 중앙군(국민당군)과 팔로군(공산당군)이 번갈아 점령했다.

성적이 우수했던 황씨는 학교가 문을 닫자 공장에서 일하다 팔로군에 강제로 입대했다. 죽을 고비도 넘겼다. 그 뒤 학력을 인정받아 교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닥친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속에서 다시 고초를 겪었다. 교단을 떠난 지 11년 만에 복직한 뒤 조선족 교육에 매진했다.

“과거 항일독립군이 말 타고 내달리던 만주 벌판 아닌가. 그 터전 위에서 우리 가락이 울려 퍼지는 그런 학교를 만들어 보고 싶었네.”

“만주는 조선족이 개척한 또 다른 조선”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에 소개된 13명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먹고살기 힘들어서, 혹은 항일운동에 뜻을 두고 정든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주한 조선족. 그들은 척박한 만주 땅을 일궈 가며 온갖 시련과 차별 속에서도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아픈 우리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들은 조선족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고국을 잊지 않았다.

“조선족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게 뭔 줄 아시오? 한국이든 북조선이든 조선족은 국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오. 다른 소수민족에 비하면 든든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지.”(단둥에서 공장노동자로 살아온 박봉규씨)

“한국방송 <가요무대>를 보면 진행자가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고 인사합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세요? 아, 조국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왕칭에서 첫 한복집을 개업한 최계선씨)

“혹시라도 한국에서 만나는 조선족이 중국을 두둔하는 언행을 보이더라도 언짢아 말게. 그나마 중국이 아니었다면 200만 조선족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나. 미우나 고우나 훗엄마(새엄마)도 어머니 아닌가.”(조선족 마을 알라디촌 발전에 기여한 배명수씨)

작가는 말한다. 조선족은 여전히 디아스포라(Diaspora·집단유랑) 한가운데 서 있다고. 갈라진 조국 어디에서도 조선족을 받아 주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만주는 조선족이 개척한 또 다른 조선”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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