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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64] "청계노조는 내가 없애 버리겠어" 고함치는 군인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이소선이 포고령으로 구속돼 있던 1980년 12월8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요원들이 이른 아침부터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을 둘러싸고 있다가 출근하는 노조 간부 8명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건장한 합수부 요원들은 노조 사무실 주변에서 기다리다 노조 간부들이 출근시간에 맞춰 나타나면 "노동 문제에 대해 잠깐 회의할 것이 있으니 같이 갑시다"며 한 사람을 여러 명이 에워싸고 강제로 연행해 갔다.

노조 간부 합수부 연행, 노조 해산명령

합수부 요원들은 처음에는 예의를 갖추는 듯한 말투로 노조 간부들을 대기 중인 승용차까지 데리고 갔다. 하지만 승용차에 타는 순간부터 태도를 바꿨다.

"야, 이 새끼야, 대가리 처박아!"

이렇게 연행된 노조 간부 8명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 채 납치됐다. 이들이 연행된 곳은 갈월동에 있는 헌병대 수사실이었다. 이곳에 연행된 노조 간부들은 청계피복노조 간부뿐만 아니라 한일도루코·해태제과·롯데제과 등에서 노동운동을 한 노조 간부나 노조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5·17 계엄 확대 이후 전두환의 계엄사 합수부에서 재야 정치인·종교계·기업인에 이어 노동계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수사한 것이다.

계엄사 합수부는 연행한 노조 간부들을 2주 동안 협박과 구타 등 공포분위기 속에서 수사했다. 그 결과 구속시킬 사람, 삼청교육대에 보낼 사람, 직장에서 해고시킬 사람, 소양교육을 보낼 사람 등으로 분류했다.

그런데 청계피복 노조 간부는 이런 분류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석방하는 날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을 한자리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계엄사 합수부 2단장의 방이었다. 대령계급의 수사본부 2단장은 청계피복노조 간부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던 중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청계피복노조는 내가 없애 버린다. 이런 노조는 노조도 아니야!"

국가가 어쩌고저쩌고, 안보가 어쩌고저쩌고 지루한 연설을 하다 느닷없이 나온 말에 노조 간부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군인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온 이소선은 기가 막혔다. 아들 태일이의 죽음과 이후 수많은 노동자들의 눈물과 외침과 숱한 고통으로 일군 노동조합인데, 간부들이 모두 연행돼 텅 빈 사무실을 경리직원 혼자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조합원들의 걱정하는 마음 덕에 위안이 됐다. 조합원들은 점심시간에 노조 사무실에 들러 안위를 묻고 걱정했다.

이소선이 석방된 일주일 후 연행됐던 노조 간부들이 석방됐다. 이소선은 이들이 그나마 구속되거나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지 않고 몸도 상하지 않은 채 무사히 돌아온 것에 안도하고 감사했다.

그러나 석방돼 나온 간부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뭔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모습이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풀려날 때 합수부 부단장으로부터 “청계피복노조는 노조도 아니야. 청계노조는 내가 없애 버리겠어”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노조 간부나 이소선은 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너무나 엄청나고, 상식 이하 발언이었기에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계엄령하의 군인 세상이지만 국민 기본권인 노동조합을 일개 군인이 자기 마음대로 없애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청계피복노조는 70년 전태일이 분신 항거한 뜻을 받들어 결성된 노동조합으로서 우리나라 민주노조의 상징이다. 이러한 노조를 그렇게 간단히 없애 버릴 수가 있을까.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은 자꾸만 자신들한테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군인이 공연히 우리를 겁주기 위해 해 본 소리겠지'라고 애써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계엄사 수사관들은 12월20일 계엄사에서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이 풀려난 이후에도 노조사무실에 수시로 찾아와 노조 간부들의 동향을 살폈다. 뿐만 아니라 정화지침 이행을 재촉하는 등 노조 운영에 관해서도 사사건건 간섭했다.

마침내 81년 1월6일 서울시가 보낸 공문 한 장이 노조사무실에 배달됐다. 박영수 서울시장 명의로 된 공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노동조합법 제32조에 의거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즉시 해산을 명함."

이 짤막한 한 줄짜리 공문을 받은 이소선과 노조 간부들은 기가 막혔다.

이소선은 70년 아들 전태일이 분신한 이후 아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을 결성해 그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노조간판을 걸었을 때를 떠올렸다. 청계피복노조는 그동안 14~15세 어린 동심들이 다락방 먼지구덩이에서 장시간 저임금으로 생명을 갉아 먹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투쟁해 왔다. 뿐만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온갖 탄압에 맞서 목숨을 건 숱한 희생으로 지켜 온 노동조합으로서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와 민중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양심세력의 노력과 희망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이러한 노동조합을 한 장의 간단한 공문으로 해산을 명한다니! 이소선은 또다시 아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절차도 무시하고 강행된 노조 해산

당시 노동조합법 32조는 "행정관청은 노동조합이 노동관계법령에 위반하거나 공익을 해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노동위원회의 의결을 얻어 그 해산을 명하거나 임원의 개선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동조합법 32조는 행정관청이 노동조합의 해산 및 임원개선을 임의로 명할 수 있는 조항으로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해치는 독소조항이었다.

그렇다지만 법에 의거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당사자한테 무엇을 위반했는지 또는 무슨 염려(?)가 있는지에 대해 소명 기회를 준다든지, 아니면 사실 확인이라도 해야 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소한의 절차나 기회조차 무시한 채 해산을 '명'했다.

당시 서울시 노동위원회는 청계피복노조 해산에 관한 안건을 조사하거나 의결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 노동위원 8명 중 4명의 이름으로 급하게 처리했다. 그것도 4명 중 1명만 서명한 것으로 볼 때 일개 군인의 명령에 서울시와 노동위원회가 들러리를 서 준 셈이다.*

청계피복노조는 1월13일 서울시장 앞으로 질의를 했다. 노조가 노동조합법 32조를 어떻게 위반했으며, 어떤 절차와 어떤 내용으로 노동위 의결을 얻었는지를 답변해 달라고 했다. 서울시 회신이 1월17일 도착했다. 내용은 이랬다.

1) 청계피복노조는 1월6일자로 이미 해산됐다.
2) 이미 해산된 노조의 이름으로 제출된 질문에는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다.
3) 노조설립신고증 반납과 노조해산에 따른 청산위원회의 조속한 구성을 촉구한다.

노조는 연일 대책회의를 했다. 그 결과 서울시의 해산명령은 불법·부당한 조치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노조해산에 따른 청산위원회에 참여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

청계피복노조의 이와 같은 방침과는 달리 상급단체인 전국연합노조(당시 위원장 김인근)는 청계피복노조 해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청계피복노조 청산위원장은 연합노조 기획실장 출신으로 당시 이운용 한국노총 교육원장이 맡았다.

이운용 실장은 임현재 지부장한테 수시로 전화를 하거나 만나서 청산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럴 때마다 임현재 지부장은 노조 내에서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면서 선뜻 응하지 않았다.**

1월10일 지부장과 간부들이 연합노조를 방문했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장이 연합노조 간부들한테 항의했다.

"지부를 해산시키는 것을 본조가 함께 지켜 주지는 못할망정 왜 그렇게 앞장서느냐? 어용을 하더라도 염치껏 해야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그러자 이운용 기획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상급단체 간부는 냉담한 답변만 되풀이했다.

상급단체 간부는 어쩌면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 봐야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실 청계피복노조 간부들과 연합노조 위원장이 면담하는 와중에도 이운용 실장은 서울시경 연합노조 담당 형사와 복도에서 청계피복노조 간부를 가리키면서 수시로 협의하고 있었다.

노조 간부들은 본조인 연합노조를 나오면서 '사방에서 우리를 죽이려 드는구나. 어디 한 군데 기댈 곳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청계피복노조만 그런 게 아니었다. 70년대 몇 안 되는 민주노조들도 이미 해산당했거나 당하고 있는 처지였다. 민주노조들이 연대해서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저마다 자신들의 상황이 다급해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10월15일 김영수 당시 서울시 노동위원회 사무국장 진술서.
** 서울 강남경찰서. 이운용 1981년 2월20일 진술조서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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