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로 되돌아가 보자. 당시는 민주화가 정착되고 경제성장의 성과가 가시화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그 시점에서 미래에 펼쳐질 그 어떤 세상의 모습을 상상한다고 해 보자.

1인당 국민소득이 실질구매력 기준으로 90년대 초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준인 3만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에 그리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자가용 승용차를 보유하고 있다. 기회가 있으면 해외여행도 다닌다. 가족 단위 캠핑도 널리 확산돼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컴퓨터를 한두 대 씩 갖고 있고 손안의 컴퓨터인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쉽게 획득할 수 있고 전파할 수 있으며,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90년대 초 이 같은 미래상을 제시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그런 세상이 자기 생전에 올 것이라 믿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런 세상이 온다면 너무 행복할 것이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바로 그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라. 과거 환상적인 미래처럼 느껴졌던 그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으로는 행복을 느끼는 정도에서 90년대 초보다도 못한 것 같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사람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본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가족은 위로와 격려를 받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돼야 한다. 직장은 동료애를 바탕으로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친구는 세속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과연 오늘날 사람들에게 이 세 지점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을까.

가족은 점점 해체돼 가고 있다. 식구(食口)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게 밥상에서 마주할 시간도 많지 않다. 위로받고 사랑을 나눌 있는 기회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반면 무한경쟁에서 승리를 압박하는 가족의 기능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가족은 학창 시절에는 성적을 두고, 청년기에는 취업을 두고, 직장인이 돼서는 승진을 두고 끊임없는 강박감을 재생산하고 있지는 않는가.

직장은 살벌한 전쟁터와 다름없는 곳이다. 출근하면서 설레는 가슴을 안고 어서 빨리 직장에 도착하기를 갈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나. 수많은 직장인들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심정으로 출근길에 오르고 있지는 않은가. 동료는 함께 업무를 수행하면서 따스한 인간애를 나누는 존재이기보다 승진을 둘러싸고 경쟁해야 하는 존재다. 업무 수행 과정에서는 성취감보다는 실적을 둘러싼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적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대접을 받는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친구들 사이에서조차 차별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술값을 계산할 때는 공연히 마음을 졸여야 한다.

가족·직장·친구 관계를 지배해야 할 사랑·동료애·우정이 심각하게 잠식되거나 변질돼 있는 조건에서 사람들은 그 무엇인가에 이끌려 하루하루를 쫓기듯이 살고 있다. 영혼은 심각하게 상처를 입었고, 가슴속은 늘 불안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도대체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돈이다. 90년대 경제성장의 성과가 가시화되던 시기는 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일상의 삶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삶 전체가 돈을 매개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외환위기와 함께 돈을 세속의 신으로 받든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신흥종교가 밀려왔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신자유주의 광풍에 휩쓸리며 일순간에 돈의 노예로 전락했다.

경제성장의 성과가 가시화됐던 90년대는 민주화가 정착돼 가던 시기였다. 그 시절 한국인들은 독재의 억압에서 벗어나 모처럼 자유인으로서 삶을 만끽했다. 액면 그대로 자유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불시에 외환위기와 함께 돈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한국인들은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극심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일시에 자살률 세계 1위 국가로 떠오른 것은 이를 반증한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소득이 오르고 기술환경이 진보한다고 해도 돈의 노예로 전락한 조건에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의 조건에 대한 환상에서 서둘러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묻고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