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1980년 4월 청계피복노조의 단체협약 갱신 투쟁에서 임금인상과 퇴직금 10인 이상 업체 적용을 쟁취한 것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첫째, 유신독제체제가 무너져 정치적 공간이 넓어진 상황에서 선도적인 투쟁을 했다. 둘째, 퇴직금의 경우 당시 근로기준법 16인 이상을 뛰어넘어 10인 이상 업체에 적용함으로써 제도개선 투쟁을 이끌었다.

4월 투쟁을 끝낸 노조 간부들은 매우 분주했다. 전국 각지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현장에서 지원·연대 요청이 쏟아졌다. 노조 간부들은 투쟁사업장에 달려가서 자신들의 투쟁 사례를 발표하고 연대를 표시했다.

이소선은 누구보다 바빴다. 이소선은 청계피복노조 임금인상 투쟁 직후 벌어진 사북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조합원들과 함께 사북으로 향했다. 사북은 전쟁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노동자와 지역주민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뚫고 이소선은 노동자들을 향해 달려가 사북탄광 노동자들을 열변으로 격려했다.

허망하게 끝난 서울의 봄

80년 봄에는 노동자들의 투쟁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투쟁도 이어졌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각 대학교에서 학내 민주화 집회가 열렸다. 학생들의 집회에도 이소선과 청계 노동자들에게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이소선과 노조 간부들은 여건이 되는 대로 각 대학교 집회에 가서 연설을 통해 노동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이소선의 고대 연설은 대단히 선동적이어서 수많은 학생들의 노동운동·민주화운동에 불을 댕겼다.

"박정희가 죽어서 민주주의가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더 지독한 놈이 나타나서 지금 민주주의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학생·노동자가 똘똘 뭉쳐서 전두환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군복 입은 놈들에게 민주주의를 빼앗겨 독재의 암흑 속에서 두들겨 맞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소선의 연설에 학생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우리가 싸우지 않고는 절대로 민주주의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 여러분! 민주주의를 위해 노동자 서민의 생존을 위해 싸웁시다!"

이소선의 선동에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함성을 지르며 교문 밖으로 향했다.

학원 민주화 집회와 투쟁 양상은 점점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학생들은 5월13일을 기점으로 "계엄 철폐" "유신잔당 퇴진" "전두환 일당 퇴진"을 외치며 가두로 진출했다. 이소선과 청계 노동자들은 학생들의 시위대열에 합류해 투쟁하느라 바빴다.

5월15일에는 서울역 앞 광장에 10만명이 넘는 학생·시민이 모여 데모를 했다. 이날도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시위에 많이 참가했다. 그렇지만 노동자 대오를 꾸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도부인 학생운동세력은 그날 집결 인파만으로도 당국에 의사전달이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다.

서울에서 15일 시위가 끝난 뒤 이후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놓고 고심하는 사이 전남 광주에서는 계속해서 시위가 잇따랐다. 신군부는 5월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시위 진압을 위해 군을 투입시켰다. 그럼에도 광주에서 계엄 철폐와 민주화,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군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광주민중항쟁이 촉발된 것이다. 살육작전이 벌어지는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돼 있었다.

5월27일 시민군이 계엄군에게 전남도청을 빼앗기면서 광주민중항쟁은 끝이 났다.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한 신군부는 민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들어갔다. 학생·지식인·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구속·수배했다. 그리고 신군부는 곧이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긴장과 공포 속에서 재야세력·학생운동 관련자들이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노동운동 관련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광주민중항쟁 진압한 신군부, 노조 탄압 나서

노동조합 탄압은 몇 단계에 걸쳐 실시됐다. 첫 번째 조치는 노동운동가에 대한 수사였다. 두 번째 조치는 이른바 노동청 업무검사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조치는 소위 사회정화 조치와 지역지부 폐지였다.

계엄당국은 이소선을 체포하기 위해 전국에 지명수배를 했다. 계엄당국은 이소선이 4월7일부터 4월17일까지 임금인상 투쟁에 앞장서고, 고려대 등 대학교에 가서 연설한 것을 지명수배 이유로 들었다. 계엄포고령 위반이라는 혐의가 씌워졌다.

이소선은 계엄군을 피해 일단 피신했다. 노동청은 업무검사라는 명목으로 탄압 대상 노동조합의 회계장부를 대대적으로 뒤졌다. 청계피복노조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노동청 직원이 연일 노조사무실에 상주하면서 노조의 모든 장부를 샅샅이 파헤쳤다.

청계피복노조는 회계 등 돈에 관한 한 전통적으로 떳떳했다. 너희들이 뒤져 볼 테면 뒤져 보라는 생각으로 업무검사에 임했다. 그런데 이처럼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웠던 노조가 탄압 주체인 노동청한테 창피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숙희 교선부장이 조합원들이 낸 조합비를 입금시키지 않고 개인적으로 유용해 버린 사실이 노동청 업무검사에서 발각돼 버렸다. 이 일로 이 부장은 즉시 사임했다. 후임으로 박원섭이 교선부장에 임명됐다.

노조는 지역지부 폐지 대상은 아니었지만 정화조치 대상에는 포함됐다. 한국노총 중앙정화위원회를 중심으로 각 산별 위원장이 추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정화위원회에서 정화조치가 하달됐다.

청계피복노조에도 정화지침이 내려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77년 9월9일 결사투쟁사건 때 구속됐던 4인(신순애·신광용·이숙희·민종덕)의 조합 임원직 사표를 신속히 받아라.

(2) 청계피복노조의 고문인 이소선 여사에게 지급되는 월급을 중단하라.

(3) 평화·동화·통일상가 이외의 건물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조합원이 될 수 없으니 그들로부터 조합비를 징수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들로부터 과거에 받은 조합비는 모두 당국에 토해 내야 한다.

노조는 대책을 숙의한 결과 (1)은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2)의 경우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월급을 내용상 지급하지만 형식상 지급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3)의 경우는 융통성 있게 운영하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조는 스스로 내린 결론대로 버티기로 하고 사태추이를 예의주시하기로 했다.

졸지에 수배자 신세가 된 이소선은 아들 전태일의 친구 집에 잠깐 머물다가 10월11일 며느리 친정인 사돈집에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요원들한테 검거돼 곧바로 구속됐다. 사유는 5·17 이전에 청계피복노조 임금인상 투쟁과 고려대 학생들 앞에서 연설한 내용이 포고령 위반이라는 것이다.

재판은 계엄하에서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군인들이 착검을 한 채 민간인을 군법회의에서 재판하고 있었다. 이소선은 왜 민간인을 군인이 재판하냐고 따졌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은 공포 분위기에서 이어졌고, 결국 포고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소선은 구속된 지 두 달 만인 그해 12월12일 계엄사령관 심사로 석방됐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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