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소재 하이디스 정문 앞. 구은회 기자
▲ 가동이 전면 중단된 하이디스 공장 내부. 구은회 기자

불 꺼진 공장 안. 컴퓨터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시선을 붙든다. 그저 그런 모니터가 아니다. 공장 안에 빼곡하게 늘어선 기계들의 언어를 통역해 주는 신통한 물건이다. 기계들이 인간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모니터 화면에서 깜빡인다.

“Step Stop 중입니다. Panel 공급 요구 중. 세정기 위치 대기 중.”

일거리를 달라고 아우성이다. 어서 유리판을 놓으라고, 깨끗하게 씻을 준비가 돼 있다고 난리다. 어미새의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입을 쫙 벌린 채 일을 기다린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먹이를 주는 이가 없다. 벌써 한 달째다.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소재 하이디스테크놀로지(주) TFT-LCD 생산현장 모습이다.

지난달 7일 회사측이 이천공장 가동과 LCD 생산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밝힌 뒤 한 달이 지났다. 그사이 회사는 전체 직원 377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공고하는 등 공장 정리수순에 들어갔다. 애플의 스타브잡스가 극찬했던 세계 최고 수준의 LCD 패널을 만들어 온 노동자들은 일손을 놓은 채 해고통보를 기다리는 시한부 처지가 됐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6일 하이디스 이천공장을 찾았다.

"한국기업에 팔렸더라면…"

하이디스는 국내 원조 LCD 생산업체다. 1989년 출범한 현대전자 LCD사업본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이디스라는 사명도 ‘현대(HYUNDAI)’와 ‘디스플레이(Display)’가 합쳐진 말이다.

98년 외환위기 당시 정부가 추진한 빅딜로 현대전자는 무려 15조원을 들여 LG반도체를 인수했다. 하지만 곧바로 불어닥친 세계적인 반도체 경기침체로 위기를 맞았다. 주거래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은 첨단기술을 보유한 LCD사업부 매각을 추진했다. 이때 LCD사업부가 하이디스라는 이름의 회사로 분사했다. 그 뒤 2002년 부도난 현대전자를 분리매각하는 과정에서 중국기업 비오이(BOE)에 팔려 나가는 신세가 됐다. 이어 법정관리를 거쳐 2008년 지금의 대주주인 대만의 이잉크사에 되팔리는 치욕을 겪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하이디스 분리매각이 추진될 당시 중국기업이 아니라 한국기업에 팔렸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어요. 그랬다면 지금쯤 우리나라는 세계를 호령하는 LCD 최강국이 돼 있지 않을까요. 고생은 우리가 하고, 이득은 저들이 보고. 정말 화가 납니다.”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는 최수영(36·가명)씨는 "채권단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자생력을 갖춘 국내 LCD 산업이 후발국가인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쇠락의 길에 접어든 데 대한 안타까움이다.

동북아시아 시장에서 제조업의 흥망성쇠는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 한마디로 일본-한국-중국 순으로 패권이 이동한다. LCD 산업도 마찬가지다. 삼성과 LG가 버티고 있긴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 분야 신흥강자는 중국과 대만이다. 중국권으로 넘어간 산업 주도권을 되찾아 오는 일 역시 매우 어렵다.
 

▲ 하이디스 노동자들이 대주주인 대만 이잉크사의 '기술 먹튀' 행각을 그림으로 풍자했다. 구은회 기자


감가상각비용 '100원' 고철이 돼 버린 기계들

불 꺼진 쇼룸에서 바라보는 공장 풍경은 흉물스러웠다. 사실 하이디스 이천공장 설비들은 고물에 가깝다. 생산직 노동자 권태영(36)씨는 “설비 사용가치를 뜻하는 감가상각비용이 100원에 불과한 기계들도 많다”며 “장치산업인 제조업체에서 설비 증설과 관리·보수·교체는 기본 중 기본인데, 하이디스를 인수한 중국과 대만자본은 이천공장에 대한 설비투자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LCD 패널 제조공정은 반도체 생산공정과 비슷하다. 원재료인 얇은 유리판이 투입되면 세정작업을 거쳐 정착과 패터닝 작업을 반복하게 된다. 유리판에 얇은 필름을 붙인 뒤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깎아 내는 작업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렇게 패터닝 작업이 끝난 유리판에 컬러필터라는 또 다른 유리판을 붙이고, 두 장의 유리판 사이에 리퀴드 크리스털이라는 액정을 주입한다. 액정이 다 채워지면 유리판 각 테두리를 막아 액정이 흘러나오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이 상태에서 제품을 굳히면 LCD 패널이 완성된다.

하지만 이천공장 생산공정은 올스톱된 상태다. 중국 비오이에 이어 2008년 하이디스를 인수한 대만 이잉크사는 지난달 7일부로 이천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제이슨 린 대표이사는 “회사는 (이천공장 생산부문) 경영정상화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안을 검토하고 시도했다”며 “하지만 이런 각고의 노력에도 생존전략을 마련하지 못해 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잉크사는 대만의 제지업계 재벌기업인 유엔풍유(YFY)그룹 계열사다. 종이로 사세를 키운 YFY그룹이 전자책 업계에 눈을 돌리면서 만들어진 회사가 이잉크사다. 전자책에 삽입할 액정화면 제조업체를 찾던 이잉크사의 눈에 띈 업체가 바로 하이디스였다.

이잉크사는 비오이에 인수된 뒤 법정관리까지 가며 부실화의 길을 걷던 하이디스를 2천600억원에 인수했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셈이다. 지난해 이잉크사 대만 본사는 200억원의 적자를 냈다. 이에 반해 하이디스가 특허권을 보유한 광시야각 원천기술(FFS)을 LG·샤프·아우오·시피티·시엠아이·비오이 같은 경쟁업체에 제공한 대가로 1천억원이 넘는 수익을 남겼다.

재주는 곰, 돈은 왕서방

이잉크사에게 하이디스의 FFS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FFS는 LCD 패널의 단점으로 꼽히는 시야각, 즉 옆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보다 진보된 액정 구동방식을 채택한 기술을 말한다. 측면에서 바라보든, 밑에서 올려보든, 위에서 내려보든 어떤 각도에서도 뚜렷하고 깨끗한 화면을 구현하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삼성의 갤럭시 시리즈를 제외한 대부분의 스마트폰과 태블릿PC에 해당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이잉크사는 이천공장 생산직은 물론이고 엔지니어를 비롯한 사무직까지 내보내고 FFS 특허권 사업에 매진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껍데기뿐인 공장만 남겨 두고 특허권을 대만 본사로 가져가 본격적으로 특허권 장사에 나서겠다는 뜻이죠. 이잉크사가 앞으로 10년간 경쟁업체들로부터 받기로 한 특허공유계약 수익액이 어림잡아 5천억원이 넘어요. 경영정상화가 어려워 희망퇴직과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는 회사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 직원은 없습니다.”

이상목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장의 설명이다. 회사측은 최근 희망퇴직 공고를 내며 직원들에게 “본인은 향후 회사의 특허사업 운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며, 향후 회사의 특허사업에 종사하게 되는 임직원들을 모욕·비방하거나 또는 달리 해당 임직원들의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여타 손해를 줄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기로 약속합니다”라는 내용에 서약하라고 요구했다. 특허사업 의지를 분명히 밝힌 셈이다.

전자책 제조업체로 시작한 대만 중소기업이 전 세계 LCD 업계를 상대로 FFS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선 꼴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격이다.

이런 가운데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와 금속노련 하이디스노조는 8일 이잉크사 본사가 있는 대만으로 원정투쟁을 떠났다. 원정투쟁단은 하이디스 노동자와 지회·노조간부 등 6명으로 꾸려졌다. 지회와 노조는 출국에 앞서 지난 6일 오후 하이디스 이천공장 안에서 출정식을 갖고 “이잉크사의 모기업인 YFY그룹이 하이디스 경영정상화의 열쇠를 쥐고 있다”며 “공장폐쇄와 정리해고 철회, 경영정상화 방안 마련을 촉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조가 주장하는 하이디스의 경영정상화는 과연 가능할까. 김종국 하이디스노조 부위원장은 “TV 등 디스플레이 대형화 추세로 국내외 경쟁업체들이 설비투자와 생산라인 증설에 나서고 있는데 하이디스는 지금 보유한 기술력만으로도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범용제품 대량 양산이 아닌 항공기 제어판이나 자동차 내비게이션, 엑스레이 판독기 같은 의료기기 부문에서 소형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면 승산이 있다는 얘기다. 김 부위원장은 “이잉크사가 특허권 장사로 챙겨 가는 수익의 3분의 1만 이천공장에 투자해도 고용유지와 제품개발, 생산부문 흑자전환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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