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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62] 단체협약 갱신 체결 투쟁
▲ 1980년 평화시장 옥상에서 단체협약 갱신 체결을 위한 농성을 벌이는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 민종덕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1979년 10·26 이후 계엄하에서 정국은 '안개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민주세력은 민주화 일정을 밝히라고 요구했고, 대학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마침내 같은해 11월24일 민주세력은 YWCA 위장 결혼식을 통해 계엄철폐와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 반대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민주세력을 탄압했고, 마침내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했다. 신군부의 등장에도 민주화 요구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80년 새봄 대학가에서는 유신철폐·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도 잇따랐다.

청계피복노조는 매년 갱신되는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협상을 그해 4월 초부터 시작했다. 단체협약 갱신 요구안의 주요 내용은 임금인상과 퇴직금제 전면 실시였다.

임금인상, 퇴직금제 전면 실시 요구 농성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렸다. 인간다운 생활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특히 청계천 피복제조공장과 같은 영세업체는 수십 년간 일을 하다 퇴직해도 퇴직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퇴직 이후에는 최소한의 생활을 꾸리기도 어려웠다. 당시 근로기준법상 퇴직금제도는 30인 이상에서 14인 이상 업체까지 확대 적용됐음에도 사용주들은 그것도 회피하기 위해 상시근로자 숫자를 편법적으로 줄이는 등 온갖 수단을 쓰고 있었다.

이에 노조가 모든 사업장에 퇴직금을 적용하라는 요구를 내세운 것이다. 단협 갱신 체결을 위한 노사협의회가 4월 초부터 진행됐지만 사업주들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회의를 유회시키면서 노조의 힘을 빼려고 했다.

이소선은 날마다 노조사무실에서 노사교섭 결과를 기다리며 좋은 소식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기도와는 달리 매번 빈손으로 돌아오는 조합 간부들을 보면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4월7일 노조측 교섭위원들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회의장인 동화시장으로 향했다. 이날도 마라톤 회의를 했지만 타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사용주측 교섭위원들이 하나둘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노조측 교섭위원들은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노조 간부들이 노사협의회 회의장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조합원들은 작업을 마치고 농성장에 올라오려다 상가 경비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견간부와 조합원들은 이날 저녁 도봉구 쌍문동 이소선의 집에 모였다. 이소선과 조합원들은 투쟁으로 요구를 관철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8일 오후 1시부터 평화시장 옥상에 있는 노조사무실에서 농성을 하기로 했다.

8일 오전 20여명의 조합원들은 ‘노조간부 7명 단식농성에 돌입하다’라는 제목의 전단을 뿌리고 임금인상에 무성의한 사용주를 규탄했다. 아울러 정부에 대해서는 영세기업의 과중한 납세로 그 부담이 노동자한테 돌아와 저임금과 실업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영세기업에 대한 조세감면 △노동 3권 보장 △노동자 복직·복권을 요구했다. 이러한 내용의 격문을 상가 각 공장에 배포하고 오후 1시까지 노조사무실로 모이라고 호소했다.

4월8일 오후 1시 이소선을 비롯해 200여명의 조합원이 7.5평밖에 안 되는 노조사무실에 빽빽이 들어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에 돌입했다.

사무실 집기를 가져다 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니 움직일 틈 없이 농성장이 꽉 찼다. 나이 어린 시다부터 임신한 아주머니까지 있었다.

7.5평 노조사무실에 꽉 들어찬 노동자들은 서로의 살과 살을 맞대고 '무릎을 꿇고 사느니 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다' 는 '정의파' 노래를 불렀다. 노예이기를 거부하는 뜨거운 열기에 땀을 뻘뻘 흘리며 농성에 돌입했다.

평화시장 옥상 곳곳에 '임금 인상하라' '퇴직금(제)을 전면 실시하라'. '노동 3권 완전 보장하라', '노동자의 복직·복권 단행하라'는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이소선은 농성투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조합원들이 굶지 않고 잘 버티려면 먹는 것을 해결해야 했다. 우선 급한 대로 빵과 우유를 사 오게 해서 노동자들한테 나눠 줬다. 노동자들은 빵과 우유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첫날을 지새웠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새우잠을 자는 사람, 경비를 서는 사람, 도란도란 얘기하는 사람 등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농성에 참여했다.

이소선은 이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비록 못 배우고 가난한 노동자들이지만 이렇게 함께 싸우고, 함께 굶고, 서로 힘을 모아 외치고 노래함으로써 더 큰 힘이 되고, 의지가 되고, 그래서 서로를 사랑하고 동지적 결속이 다져지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노조사무실로 모여드는 조합원들

4월9일 농성소식을 듣고 조합원들이 노조사무실로 모여들었다. 새로 모인 조합원들은 사무실 밖에서 연좌농성을 하며 임금인상을 외쳤다. 이날 오후 3시께 동화상가 옥상에서 단식을 하던 부녀부장 신순애가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

신순애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시다에서 시작해 15년 가까이 일한 끝에 미싱사가 됐다. 75년 노동시간단축 투쟁 무렵부터 노동운동을 하다 77년 9월9일 결사투쟁 때 구속돼 1년 가까이 징역을 살고 나왔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데다, 단식까지 했으니 졸도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노사는 이날 동화상가 옥상 회의장에서 3시간 동안 회의를 했으나 사용주측에서 임금 15~22%만 인상하고 퇴직금·상여금은 줄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렬됐다.

4월10일 오후 3시께 6번째 노사협의회가 열렸다. 이날도 몇 차례나 회의가 중단되고 타협안이 오갔으나 사용주측에서는 농성을 풀라는 말만 할 뿐 임금인상에 대해서는 의견을 좁힐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전갈이 농성장에 있는 이소선한테 전해져 왔다. 이소선은 "해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임금인상이 중요한데 사용주들은 임금인상에 왜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것이냐" 며 분개했다.

"봐라, 저렇게 좁은 사무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질식할 것만 같은데…. 지들이 하다 지치면 저절로 풀이 꺾여 스스로 해산하겠지 하는 속셈인가 본데 누가 이기나 해 보자!"

근로감독관은 양측을 오가며 임금 28% 인상, 상여금 150% 지급을 담은 중재안을 제시했다. 중재안은 노사 양측이 모두 거부했다.

사용주측에서는 조정신청을 내겠다고 윽박질렀다. 노조는 국가보위법을 철폐하고 노동 3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마당에 직권조정이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계속해서 투쟁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회의장에서 나왔다. 그리고 4일간의 단식농성을 해제하고 노조사무실 농성장에 합류했다.

노조사무실에서 농성하던 조합원들은 3일간 철야농성으로 말미암아 얼굴이 창백해진 데다 세수를 제대로 못해 얼굴에 때가 묻고 목이 쉬어 있었다.

장기전으로 돌입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당장 솥단지를 걸어 놓고 쌀을 가마니째 사다가 불을 피워 밥을 지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농성 참가인원을 사무실 밖에서 떨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평화시장 옥상에 천막을 치고 간단하게 집도 지었다. 이렇게 장기적으로 싸울 채비를 갖췄다.

이런 작업들은 어느 누가 시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할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해낸 결과다. 필요한 일은 뭐든지 금방금방 착착 진행됐다. 이소선은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우리끼리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이 따로 없고, 시키는 사람 시킴을 당하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평등하다, 모두가 자유스럽다, 모두가 귀하고 사랑스러울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대동세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농성투쟁이 길어지면서 농성 조합원들의 부모들이 농성장에 찾아와 노동조합에 항의하며 자식을 데려가려고 했다. 이소선은 이들 부모님들을 설득해 동조하게 만드는 일을 도맡아 했다.

날이 갈수록 농성 참가자들이 늘어났다. 조합원들은 농성장을 중심으로 각 상가마다 돌며 시위를 시도했다. 그럴 때마다 기동경찰들과 충돌해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소선은 이들을 하나하나 보살피며 농성을 계속했다.

농성을 시작한 지 닷새째 밤이 됐다. 나날이 늘어 가는 농성인파로 잠자리가 매우 불편했다. 집에 가야 할 사람은 가고, 낮에만 오라고 해도 함께 고생을 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가지 않는 조합원들이 적지 않았다. 담요와 이불을 사 왔다. 이소선은 고생하는 조합원들이 4월의 추위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사무실 안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은 비좁아서 매우 불편하고, 사무실 밖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은 추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나마 이불과 담요가 있으니 다행이었다. 덮을 것을 지원해 준 사람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추위를 견디며 농성을 하고 있는데 밤늦게 비가 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필 이럴 때 비가 오다니, 부랴부랴 비닐을 갖다가 천막을 치고 주방에도 비닐을 쳐서 비바람을 막았다. 또 모래를 가져다 천막 주변을 막았다.

비는 계속 오고 빗물까지 떨어졌다. 할 수 없이 사무실과 천막·주방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평화시장 3층 복도에 종이상자를 깔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조합 간부들은 잠을 자지 않고 아직 농성에 참가하지 않은 조합원들에게 보내는 유인물을 밤새워 만들었다.

전태일 모의 장례식, 그리고 승리


비는 다음날에도 계속 왔다. 빗속에서도 참가자들은 열심히 구호를 외쳤다. 농성 프로그램에 따라 상가 주변을 돌면서 시위를 계속하고 선전전을 했다.

이소선은 비닐로 두른 비가림막에서 수백 명의 조합원들이 먹을 주먹밥을 만들었다. 이소선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조합원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에 신경을 썼다.

비를 맞으며 주먹밥을 맛있게 먹는 조합원들의 모습은 마치 전쟁통에 봤던 장면 같았다. 비가 계속 내렸지만 농성 참가 조합원들은 계속 늘어났다. 잠자리가 큰 문제였다. 그래서 참가 조합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100여명의 조합원만 남아 철야농성을 하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집으로 보냈다.

농성투쟁을 하면서 노사 교섭위원들이 교섭을 했지만 크게 진전되는 것은 없었다. 이소선은 고생하는 조합원들을 볼 때 하루라도 빨리 타결돼야 할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어 연신 담배를 피워 댔다. 농성투쟁은 주말에도 이어졌다.

4월16일에는 평화시장 옥상에서 '전태일 모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그날 장례식에서 개최자들은 "지금까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던' 우리들의 근성을 동지 앞에 활활 불태워 버리고, 70년대에 우리가 깨우치지 못해 우리 손으로 동지를 죽여 보냈지만 1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동지의 커다란 외침을 통해 눈과 귀가 뚫려 동지를 결코 죽음으로 보내지 않고 우리들 가슴마다에 당신의 넋을 활활 불타게 하고 임금인상 투쟁에 당신이 임하셔서 우리의 투쟁대열에 선봉이 돼 힘과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마련된 장례식"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이소선 기도 순서가 됐다.

"주여! 여기 억눌리고 약한 당신의 딸들이 일주일째 밤잠을 안 자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약한 근로자들을 보살펴 주시어 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시고 업주들의 잘못된 마음을 주님의 능력으로 돌려주십시오. 우리는 주님이 약한 자의 편임을 믿사옵니다. 우리 앞에 임하셔서 우리의 투쟁에 힘이 되시고 이들의 건강을 돌봐 주시리라 믿고 싸워서 이기겠습니다."

이소선의 간절한 기도에 500여명의 농성 참가 조합원들이 눈물을 흘렸다. 농성자들은 추모가를 부르며 모의 관을 메고 대형만장을 앞세우고 행진했다. 행렬은 평화시장 옥상을 몇 바퀴 돈 다음 각 상가를 돌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전태일의 영정을 선두로 진행되는 행렬을 기동경찰이 가로막았다. 조합원들은 "전태일 동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고 외치고 추모가를 부르며 기동대와 몸싸움을 벌였지만 다시 옥상으로 밀려났다.

이소선은 10년 전 죽은 태일이가 또다시 죽어서 장례를 두 번이나 치르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애꿎은 담배만 태웠다.

사용주측과 숱하게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합의점에 도달해 가는 것 같았다. 이소선은 이럴 때 조금만 버티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재에 나선 노동청 중부사무소장은 사용주측 노사협의위원들에게 임금 29% 인상, 퇴직금 10인 이상 업체 100% 실시라는 조정안을 상정했다. 저녁 7시30분까지 회의를 한 끝에 사용주측이 조정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에 통일상가 일부 사용주들이 임금인상 29%, 퇴직금 10인 이상 100%를 사용주측 노사위원이 받아들인 데 대해 항의하면서 가게 문을 닫고 동화상가 옥상에 있는 근로감독관실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노조측에서도 조정안을 놓고 철야회의 끝에 상여금 80%, 미싱사 최저 30% 인상을 추가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결국 노조측에서 추가 협상안을 철회하고 4월17일 밤 조정안으로 타결됐다.

평화시장 옥상 농성장에서 회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조합원들이 사무실을 천막과 비닐로 막아 놓은 곳에 옹기종기 모여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교섭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행을 발견하고 "어떻게 됐어요" 하고 소리쳤다. 200여명의 조합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회의 결과를 다그쳐 물었다. 한 교섭위원이 "잘됐어" 하며 금방 조인한 단체협약서를 높이 쳐들자 일제히 "만세", "우리가 이겼다"는 환호와 함께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껑충껑충 뛰었다.

여기저기서 "언니 수고했어", "아니야, 네가 고생 많았다", "형 수고했어요", "뭘 모두 다 수고했지" 하며 인사를 했다.

농성 조합원들은 일제히 이소선을 향해 "어머니,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며 큰절을 했다. 이소선은 가슴이 울컥해서 즉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너희들이 고생 많았다. 장하구나. 청계피복노조 조합원!"

이 말이 떨어지자 일제히 "우리 승리했다"는 노래를 즉석에서 지어 쉴 새 없이 불렀다. 만세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아무나 붙잡아 헹가래를 치며 손에 손을 맞잡고 줄을 지어 "우리 승리하리라", "전태일 동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는 노래를 부르며 평화시장 옥상을 돌며 꽹과리·징·장구 소리에 맞춰 춤을 췄다. 춤을 추다 지치면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또 일어나 노래하고 춤추며 승리의 물결로 밤을 지새웠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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