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회 기자

압력밥솥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압력을 제어하는 기술이다. 압력의 정도가 밥맛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자취생을 위한 1인용 밥솥이든, 대가족을 위한 10인용 밥솥이든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거기에 적용된 압력 제어기술이 밥맛을 좌우한다.

외국계 자본의 ‘기술 먹튀’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하이디스테크놀로지에서 생산되는 LCD 패널도 마찬가지다. 패널 크기가 손바닥만 한지 아니면 운동장만 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LCD 패널이 적용된 제품의 화면이 잘 보이게끔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이디스가 특허권을 보유한 광시야각 원천기술(FFS)은 LCD 패널의 단점으로 꼽히는 시야각, 즉 옆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보다 진보된 액정 구동방식을 채택한 기술이다. TV 대형화와 스마트폰·태블릿PC 같은 휴대기기가 확산되면서 광시야각 기술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한마디로 돈 되는 기술이다.

이 같은 알짜기술이 외국기업에 통째로 넘어가게 생겼는데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 중이다. 하이디스에서 생산되는 3.5세대 LCD 제품은 국가 보호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갑자기 숫자가 등장하니 복잡한 내용 같지만 알고 보면 단순한 얘기다.

LCD 세대는 패널을 만들 때 사용되는 유리판 크기로 구분한다. 쉽게 말해 1세대 제품이 가장 작고, 10세대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7세대 이후 기술만 국가 보호대상이 되기 때문에 3.5세대 기술을 운영하는 하이디스는 보호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아무리 훌륭한 압력 제어기술이 적용됐더라도 소형밥솥에 특허권을 보호해 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황당한 논리다. 이미 하이디스와 특허공유계약을 맺은 중국업체에서 만들어진 8세대 LCD 패널이 삼성전자 100인치 TV에 적용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이디스 대주주인 대만 이잉크사는 하이디스 이천공장 제품생산을 사실상 포기하고 특허권 대여사업에 집중해 왔다. 하이디스 국내 경영진이 지난해 이잉크사에 “130억원을 투자하면 고용 유지와 생산부문 흑자 전환이 가능하다”는 사업계획을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잉크사는 지난해 1천억원의 기술료 수입을 챙겼다.

현재 이천공장에서 진행 중인 인력 구조조정까지 마무리되면 이잉크사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장사가 가능해진다. 기술 먹튀가 공공연하게 진행되는데도 한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국부가 유출되고 고용이 흔들리는데 LCD 세대 타령이나 하는 것이 한국 정부의 인식 수준이다. 남 좋은 일이나 시켜 주는 것이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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