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판결/ 서울행정법원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사건의 경과

이윤정씨는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7년 5월에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에 입사했고, 유명화씨는 그로부터 약 3년 후(2000년 7월께)에 같은 공정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은 반도체 조립라인이 있던 곳으로서 가공공정을 거쳐 넘어온 웨이퍼를 연마하고 절단한 후 칩 접착·금선 연결·성형·도금 등의 세부 공정들을 거쳐 완성된 반도체 칩을 만드는 곳이다. 두 노동자는 고온테스트(MBT) 공정이라고도 불리는 ‘검사’ 공정에서 근무했는데 수백 개의 반도체 칩을 틀에 고정시킨 채 섭씨 120도로 가열한 상태로 전류를 흘려보내 칩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검사하고 불량품을 선별하는 곳이다.

이윤정씨는 약 6년간 근무 후 퇴직했는데(2003년 7월), 그로부터 약 7년 후에(2010년 5월) 뇌종양(교모세포종) 진단을 받았다. 또한 유명화씨는 근무를 시작한 지 1년4개월여 만에(2001년 11월께) 재생불량성 빈혈 진단을 받았다.

두 노동자 모두 삼성전자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매우 건강했고 관련 질환에 대한 병력이나 가족력도 없었으나, 온양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다양한 화학물질에 노출된 채 만성적인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결국 두 사람은 질병이 온양사업장의 업무환경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해 각각 2010년 5월과 7월에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요양급여를 청구했다.

그에 따라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원)에 역학조사를 의뢰했는데 산보연은 사업장 방문조사와 문헌조사 등을 거친 후 “사업장 내 유해물질 노출 수준이 낮다”며 “업무관련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산보연의 조사는 다른 연구(2009년 서울대 산학협력단의 조사)에서 노출가능한 것으로 언급된 일부 물질(포름알데히드·에틸렌옥사이드 등)과 두 노동자가 유해요인으로 특별히 지목한 물질(고온테스트 직후 기계에서 배출되는 ‘고무 타는 듯한 냄새’와 ‘검댕’)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다. 조사 결과를 평가하는 회의(역학조사평가위원회)에서도 평가위원 중 1명이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그대로 조사를 종결하는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결국 근로복지공단은 2010년 9월과 2011년 2월 두 사건 모두에 대해 “질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요양급여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두 노동자는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는데 소 제기 한 달 뒤인 2011년 5월7일 이윤정씨는 뇌종양 악화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판결의 요지

서울행정법원 이상덕 판사는 아래에서 나열하는 사정들과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을 종합해 원고들이 업무 중 유해 화학물질과 극저주파 자기장, 주야간 교대근무 같은 유해요인들에 지속적·복합적으로 노출된 것과 원고들의 질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했다.

첫째 ‘유해 화학물질 노출’과 관련해 재판부는 원고들이 ‘검사 공정’ 자체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과 인근공정에서 배출돼 검사 공정으로 유입된 유해물질에 복합적으로 노출된 것으로 봤다. 특히 ‘검사 공정’에서는 ‘몰딩 공정’(반도체 칩의 표면에 일종의 보호막을 입히는 공정)을 거치고 나온 반도체칩을 120도로 가열하는데, 산보연의 2012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에폭시 몰딩 컴파운드’(몰딩 공정에서 반도체 칩의 표면에 입히는 물질)를 가열하면 벤젠·메틸이소부틸케톤·포름알데히드 등의 발암물질이 배출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검사 공정’에서는 작업자가 고온테스트 설비를 열었을 때 고무 타는 듯한 냄새의 뜨거운 증기가 배출됐고 기계 내부에 잔류한 검댕을 에어건으로 청소하기도 했는데, 이때 위와 같은 유해물질들에 고농도로 노출됐을 개연성이 있다고 봤다.

둘째 ‘극저주파 자기장 노출’에 대해서는 원고들이 200여대의 고온테스트 설비 사이에서 작업했으므로 상당 정도의 극저주파 자기장에 노출됐을 것인데, 극저주파 자기장과 뇌종양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결과가 여럿 보고됐고, 특히 화학물질과 극저주파 자기장에 복합적으로 노출되면 뇌종양의 발생위험이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도 있으므로 “원고들에게 노출된 극저주파 자기장과 원고들의 질병 사이에 관련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셋째 ‘주야간 교대근무로 인한 영향’도 유해요인 중 하나로 봤다. 원고들은 재직기간에 주야간 교대근무와 연장근무까지 함으로써 지속적인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는데, 이것이 원고들의 면역력에 악영향을 미침으로써 질병의 발병이나 진행을 촉진하는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을 것으로 봤다.

한편 재판부는 ‘업무관련성이 낮다’고 결론 내린 산보연의 역학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네 가지 측면에서 중대한 한계가 있다”고 했다. 우선 2010년에 실시된 측정 결과가 원고들이 근무했던 2000년경의 작업환경을 설명할 수 없고, 다른 연구결과에서 노출가능하다고 언급된 물질과 원고측이 대표적인 유해물질로 언급한 ‘고무 타는 듯한 냄새’와 ‘검댕’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으며, 노출기준 미만의 저농도 노출이라도 여러 유해물질에 복합적으로 장기간 노출되면 유해성이 상승할 수 있다(이른바 유해성의 상가작용)는 점을 간과했고, 원고들이 노출된 것으로 보이는 다수의 화학물질 중에는 아직 그 성분조차 확인되지 않은 물질들이 많은데 그러한 물질과 질병 사이에 관련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판결의 의미

이른바 ‘입증 곤란’의 문제는 거의 모든 직업병 인정소송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소송에서는 특히 더 심각하다. 우선 공정자체가 매우 복잡해 고려해야 할 유해요인이 많고 생산기술이나 취급물질이 빠르게 변화하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회사가 업무환경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구비하지 않거나 보존하지 않으며 보관 중인 자료마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은폐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질병의 발병 원인이나 기전에 대한 의학적 연구사례 마저 부족한 경우가 많아 노동자들은 매우 무기력한 입증곤란의 상황을 겪는다.

결국 노동자들은 자신의 질병이 업무와 무관해서가 아니라 그 관련성을 밝혀낼 수 없어서 산재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필자는 착잡한 마음으로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첫째는 ‘노동자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빚어진 입증 곤란의 문제에 따른 불이익을 온전히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타당한가’이고, 둘째는 ‘이런 식으로 국가(근로복지공단)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치유와 재활·생계보장을 외면하는 것이 산재보상보험제도의 목적과 취지에 부합하는가’이다.

물론 노동자들이 아무런 입증자료도 없이 산재보상을 신청하는 것은 아니다. 질병의 업무관련성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갖고 직업병 보상을 요청한다. 문제는 그러한 자료와 입증곤란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경위, 산재보상제도의 취지 등을 고려해 이들의 치료와 생계보장을 산재보상제도의 보호범위 안으로 적극 포섭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정들은 고려하지 않은 채 명확한 인과관계 규명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보호범위에서 배제하고 말 것이냐다.

이 사건의 재판부는 위와 같은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분명히 드러냈다. 먼저 입증 곤란의 문제와 관련해 이 사건에서는 특히 업무환경에 대한 산보연의 역학조사마저 매우 부실하게 이뤄져 원고측이 겪어야 할 입증 곤란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는데, 이에 대해 재판부는 산보연 역학조사의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짚으며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이러한 사정은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함이 마땅하다”고 했다. 또한 “특정 화학물질과 질병 사이의 관련성이 아직 연구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관련성이 없다 또는 낮다는 판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 된다”고도 했다. 위 두 문장은 이 사건을 포함한 모든 반도체 직업병 사건이 갖는 본질적인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이 사건 판결의 또 다른 중요한 의의는 ‘질병의 업무관련성’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을 하기에 앞서 ‘산재보상보험제도의 목적’을 설시했다는 점이다. 즉 “작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상의 위험을 사업주나 근로자 어느 일방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보험을 통해 산업과 사회 전체가 이를 분담하도록 하는 것”을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이라고 명시한 후 이 사건 상당인과관계 판단의 주요 고려사항으로 참작하고 있다.

또한 이 판결은 사회적으로도 의미를 갖는데, 우선 법원이 반도체 ‘조립’라인 노동자의 질병을 직업병으로 인정한 첫 사례라는 점이다. 그동안 법원의 인정 사례들은 모두 웨이퍼 ‘가공’라인 소속 노동자들이었다. 아울러 반도체 노동자의 ‘뇌종양’에 대해서는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을 통틀어 최초의 인정사례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근로복지공단이 뇌종양 부분에 대해 항소해(유명화씨의 재생불량성 빈혈 부분은 그대로 확정됐다) 이윤정씨의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에서 계속 심리 중이다. 망인의 유족들이 겪어 온 고통과 반도체산업 직업병 피해자들이 거쳐 온 험난한 과정들을 생각할 때 부디 고등법원에서도 이 사건 원심판결의 올바른 취지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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