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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61] 그 추웠던 전태일 추도식
▲ <민중신학의 탐구> 서남동 목사 지음.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1979년 10월26일 유신독재의 깊숙한 곳, 궁정동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다.

유신독재의 정점인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으니 유신독재도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러나 18년 장기집권의 끈질긴 명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사망하자 곧바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인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민간인으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사람이 군복을 입고 고압적인 얼굴로 TV에 나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수사발표'라는 것을 했다.

계엄사에서는 연일 "경고한다"고 하면서 계엄포고령을 발표했다. 계엄포고령에 의해 모든 집회는 불허됐다. 노동조합의 정상적인 활동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됐다. 그렇지만 이소선과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은 아무리 군인들이 설치는 세상이지만 군인들이 언제까지 민간한테 설치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박정희가 군부쿠데타로 집권해서 그 지긋지긋한 군부독재를 18년간이나 했는데 또다시 군인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는다면 이제는 국민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군부의 등장, 얼어붙는 정국

청계피복노조는 계엄 상황에서도 힘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77년 노동교실 사건으로 많은 피해를 당한 만큼 78년에는 조직 내부 갈등으로 흐트러진 조직을 정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조합원 교육을 통해 활동인자를 늘려 나감으로써 조직 강화를 꾀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77년에 빼앗긴 노동교실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조는 77년 이후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 적당한 건물에 세를 얻어 입주해 노동교실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노동교실로 쓰기 위해 세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물주들은 노동조합에서 세를 얻는다고 하면 기겁을 하고 계약을 취소했다. 요행히 건물주와 계약해서 입주를 하더라도 일주일을 견디지 못하고 쫓겨났다. 노동교실이 입주한 건물주한테 중앙정보부·경찰·세무서 등이 나서 노동교실을 내쫓으라고 압력을 가하니 이런 압력을 견딜 건물주가 있겠는가. 압력을 받은 건물주는 마치 죽기를 각오한 듯이 노동교실을 내쫓았다.

이소선은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한탄했다.

"참, 야비한 새끼들! 지놈들(정부당국)이 직접 내쫓는다면 우리가 끝까지 싸우기라도 하겠는데, 죄 없는 건물 주인을 앞세워 탄압을 하다니. 건물 주인과 죽고 살기로 싸울 수도 없잖아!"

이때부터 이소선과 청계노동자들은 노동교실로 사용할 수 있는 노조 명의 건물이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을 갖게 됐다.

계엄정국은 날이 갈수록 꽁꽁 얼어붙었다. 유신독재를 완전하게 끝장내기 위해서는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의 준동을 저지해야 했다. 재야 민주세력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등장을 막기 위해 은밀하게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오직 관혼상제만 허용됐기 때문에 결혼식을 가장한 집회를 준비했다. 그것이 'YWCA 위장 결혼식'이다.

이 무렵 79년 11월13일 전태일 9주기 추도식이 마석 모란공원 묘소에서 열렸다. 꽁꽁 얼어붙은 정치적 상황처럼 추도식 날은 날씨마저 유난히 추웠다.

계엄령으로 위축된 분위기라 조합원 참석도 저조하고 청계피복노조 조합원 이외 사람들도 별로 참석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추도식을 집전할 목사도 모시기 힘들었다. 목사들도 몸을 사렸다.

그런데 당시 선교교육원 원장으로 계시던 서남동 목사가 흔쾌히 추도식 집전을 맡아 주기로 했다. 서 목사는 '민중신학' 이론을 설교뿐 아니라 철저하게 실천했다. 늘 노동자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었다.

서 목사는 계엄하 엄혹한 상황에서 추도식 말씀을 통해 거리낌 없이 유신잔당을 비판하고 신군부가 등장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박정희 독재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의 추종자들이 인위적으로 신화를 만들었지만 전태일처럼 정의로운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신화가 없었지만 죽어서 그 신화가 만들어지고 그 신화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한테 선하게 살아남을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는 똑같은 두 죽음이지만 대비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남동 목사, 추도식서 군부에 날 선 비판

그러면서 서 목사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번쩍 추켜올렸다.

"여러분! 이 책을 보십시오. 이 책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젊은이의 아름다운 신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은 전태일 열사의 일생을 기록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의 훌륭한 청년 전태일의 일생을 기록한 책이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출판되지 못했지만 이웃 일본에서 출판이 됐습니다."

서 목사는 당국의 탄압이 예상돼 우리나라에서는 출판하지 못한 <전태일 평전>을 일본에서 구입해 가지고 온 것이다.

"독재자 스스로 권력이라는 아성으로 쌓아 놓은 신화가 무너졌습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신화입니까! 이제 민중의 뜨거운 사랑으로 쌓아 놓은 아름답고 튼튼한 신화로 이 세상을 바꿔 나가야 하겠습니다. 여기 전태일은 그 신화를 창조해 낸 주인공입니다."

초겨울 뼛속까지 스며드는 찬바람 부는 산비탈에서 노(老) 목사의 뜨거운 외침이 얼어붙은 가슴을 녹였다.

이소선은 설교를 마친 목사한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것을 헤치고 나아갈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선지자가 있기에 우리 노동자들은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그 선지자적인 말씀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우리는 어머님을 보면서 용기를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날 참가자들은 추위와 쓸쓸함 속에서도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어 하산했다.

이소선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산 아래 상황이 절망적일지라도 우리는 거기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 다시 희망을 일궈야 하기 때문이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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