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연구가

간만에 K를 만났다. K는 변함없이 세칭 자주파를 이끄는 주요 간부 중 한 명이었다. 간만의 만남이라서 그런지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K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내용은 다분히 나의 정치적 견해를 묻는 것이었다. 마치 사상검증을 하는 것 같아 떨떠름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K는 자신의 견해를 먼저 피력한 다음 그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묻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갔다. K 사고의 골조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K는 자주파 간부답게 민족자주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었다. 자주화의 중심고리는 변함없이 주한미군 철수라고 못을 박듯이 강조했다.

K의 생각이 전체 자주파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일정한 변화가 있을 수 있고, 하나로 묶어 표현하기에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필자는 그에 관계없이 K에 대해서만 대응하기로 하고 확인 차 질문을 던졌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네. 자넨 한국은 변함없이 미국의 식민지이며 그 핵심 기제는 주한미군 주둔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주한미군 철수 없이는 그 어떤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거꾸로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여타의 문제가 쉽게 풀린다고 보는 것이고.”

K는 잠시 머뭇거리다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부터 필자는 정색을 하고 입장을 개진했다.

한 나라가 자주권을 확보하고 있는가 여부를 가리는 가장 중요한 징표는 국민이 원하면 자주적 정부를 세울 수 있으며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자주적인 정책을 구사할 수 있는가 여부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기본적 수준에서 자주권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정착이 만들어 낸 결과다.

민주화 이전 한국 사회 권력구조는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고 군부가 국가를 통제하며, 주한미군이 작전권을 고리로 군부를 통제하는 식이었다. 민주화는 이러한 통제의 연쇄사슬을 끊어 내는 과정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화는 가능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의미 또한 없었다. 1994년 주한미군이 한국군 평시작전권을 반환한 것도 이런 사정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민주화 덕분에 국민이 원하면 자주적 정부를 수립할 수 있으며 정부도 자주적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해 줬다.

핵과 미사일 문제로 북미 간 갈등이 고조되던 98년 무렵 김대중 정부는 클린턴 행정부를 설득해 한반도 냉전체제를 해체시키는 방향에서 북한과의 협상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위해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 총괄기획자인 임동원은 페리 대북정책 조정관을 9차례나 만났다. 2004년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으로 6자 회담이 표류하고 있었을 때 노무현은 부시 미 대통령을 직접 설득함으로써 6자 회담에서 9·19 합의를 도출하는 데 협력하도록 만들었다. 다음은 2004년 11월20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중 노무현과 부시의 대화 내용이다.

부시 : 김정일은 폭군이며 그래서 믿지 않습니다.

노무현 : 믿는 사람과는 협상이 필요 없으며 협상이라는 것은 원래 믿기 어려운 사람과의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부시 :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매우 좋은 지적입니다.

노무현 : 협상할 때에는 때로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참거나 협상이 끝날 때까지 미룰 필요가 있습니다.

부시 : 좋은 지적입니다. 저는 김정일을 거짓말쟁이라고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노무현 :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위기감이 클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핵무기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시 : 네.

노무현 : 각하께서는 미국의 대통령입니다. 6자 회담 참가국들과 함께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부시 : 저도 그것을 원합니다. 제 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주화의 중심고리는 주한미군 철수가 아니라 자주적 정부 수립이다. 자주적 정부가 수립될 때 주한미군 문제를 포함해 자주의 과제들을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다. 거꾸로 박근혜 정부의 전시작전권 무기 연기에서 드러나듯이 자주적 정부 수립 없이는 자주화의 전진은 한 치도 기대할 수 없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주한미군 철수는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대중의 삶을 개선시키는 관건적 요소는 아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는가? 정녕 그대는 “주한미군 철수시켜 비정규직 해결하자!”고 외칠 수 있는가? 자주화의 과제는 주한미군 철수를 넘어 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K 자네는 너무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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