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 1979년 8월 YH 사건 신문보도. 민종덕

1977년 9·9사건으로 구속됐던 신승철·김주삼이 4월에 출감했으니 구속돼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힘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허약해진 조직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청계피복노조를 탄압하고, 동일방직노조를 어용화시킨 데 이어 자본과 권력은 또 하나의 70년대 대표적인 민주노조인 YH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YH주식회사는 가발을 수출하는 업체였다. 창업주인 장용호는 70년 YH무역회사를 자신과 진동희의 공동명의로 등기했다. 국내 경영은 진동희 사장에게 전담시키고 자신은 시장 개척을 핑계로 YH 제품을 판매하는 '용인터내셔날 상사'를 미국에 설립했다. 진동희 사장은 YH 제품을 다른 회사보다 훨씬 싼값으로 장용호의 회사에 수출했다. 장용호는 후불조건으로 사들인 300만달러 상당의 제품 값을 대금결재 시한인 3년(75년)이 지나도록 갚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외화도피를 기도했다.

진동희는 사장으로 있으면서 장용호에게 특혜 수출을 하는 동시에 YH로부터 자본을 빼돌렸다. 73년에는 YH해운을 설립해 자신의 잇속을 채웠다. 국외와 국내에서 자본을 빼앗긴 YH무역은 점점 쇠퇴해 가기 시작했다. 76년 말 가발경기 후퇴와 더불어 장용호로부터 수출대금이 상환되지 않자 은행부채가 급격히 늘어났다. 진동희는 YH해운을 대보해운으로 회사이름을 바꾸고 사장으로 옮겨 가면서 박정원을 대표이사로, 김종혁을 재정관리 상무이사로 취임시켰다.

자본의 추악한 본질 드러낸 YH 사건

진동희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외화도피와 부정행위, 무리한 사업을 계속했고, 결국 회사는 빚더미에 앉게 됐다. YH무역의 계속되는 적자로 인해 원리금 상환이 중단되자 조흥은행은 79년 1월10일 YH무역을 적색기업으로 단정하고 거래중지는 물론 면목동 공장을 차압하겠다고 경고장을 보냈다.

경영진의 폐업공고에 맞서 노조는 당연히 폐업 철회를 요구했다. 경영진들은 회삿돈을 뒷구멍으로 빼돌려 놓고 빈껍데기만 남겨 놓은 채 폐업을 하겠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단물을 실컷 빨아먹고 뱉어 버리겠다는 심사였다.

이소선은 YH의 기업주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자본가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 끝없는 욕망, 그것을 채우기 위한 온갖 부정과 비리, 비인간적인 처사, 자기만의 잇속에서 희생당하는 노동자의 참상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기가 막혔다. 이소선은 전태일이 본 세상을 떠올렸다.

전태일 "그대는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ㆍ비인간적 행위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전태일의 일기 중에서)

꽃다운 여성노동자 김경숙 

▲ YH 여성노동자 고 김경숙. 민종덕

YH 노동자들은 4월13일 노조 총회를 열고 공장 안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노동청 차장 등이 YH무역 폐업공고 철회를 약속하자 곧 정상근무에 들어갔다. 이 약속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지화돼 버렸다. YH 노동자들은 7월30일부터 다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회사는 8월6일 전격적으로 폐업을 공고했다.

노동자들은 "정상화 아니면 죽음이다"는 구호를 머리띠에 써서 두르고 8월9일 아침 9시30분을 기해 마포에 있는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187명의 여성노동자들은 죽음을 각오한 투쟁에 돌입했다. 그제서야 YH 노동자들의 문제가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방송에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사건이 나자 이소선은 서둘러 신민당사로 달려갔으나 당사 주변에 경찰들이 철통같이 둘러싸고 있어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할 수 없이 집에 돌아와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8월11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라디오를 들어보니 신민당사에서 농성하고 있는 여공들이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했다고 하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아 들려 나가는 광경, 국회의원들이 두들겨 맞아 피 흘리는 장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 된 신민당사의 모습이 신문에 실려 있었다. 그리고 1명의 노동자가 죽었을지 모른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소선은 도무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발 죽은 사람은 없어야 할 텐데. 이소선의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하지만 이소선의 기도도 소용없이 뉴스에서 노동자의 죽음을 전했다. '그토록 죽은 사람이 없기를 바랐건만….'

보도에 의하면 노동자 김경숙은 왼팔 동맥이 끊긴 채 4층 강당에서 떨어져 당사 후편 지하실 입구 아래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새벽 2시30분께 한 맺힌 목숨을 마쳤다.

그 소식을 듣고 이소선은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맨정신으로는 김경숙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한창 피어날 꽃다운 나이의 어린 여성노동자 김경숙. 척박한 이 땅에 태어나 착하고 진실 된 노동자로 살아가고 싶었건만…. 온갖 멸시와 천대 속에서 피워 보지도 못한 젊음을 노동자 생존권 투쟁의 제단에 바친 그의 넋을 어떻게 위로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의 부모들은 얼마나 가슴을 찢는 슬픔에 젖어 있을 것인가! 자식을 낳아 보고, 자식을 키워 보고 또 자식을 비참하게 잃어 본 이소선은 누구보다 그 심정을 이해했다. 이소선의 뺨 위로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

그날도 신민당사까지 갔지만 경찰이 막고 있어 싸움만 실컷 하고 되돌아왔다. 다음날에야 겨우 신민당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4층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을 보니 핏자국이 아직도 선연했다. 핏자국을 보니 이소선의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그는 덜썩 주저앉아 핏자국을 매만지면서 통곡했다.

"세상에! 노동자는 이렇게 때려죽여도 되느냐!"

누구를 향한 외침인지도 모르게 그는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가 우는 것을 보고 함께 온 사람들은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함께 울었다.

"노동자 피땀으로 정부가 움직이는 것인데 노동자의 피를 이렇게 흘리게 하고 목숨을 끊어도 되는 거냐!"

박정희 정권 부마 민중항쟁 짓밟아

이소선은 소리를 지르며 신민당사를 헤집고 다녔다. 정부 관계자나 기업주가 옆에 있다면 이빨로라도 물어뜯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YH 노동자들의 투쟁을 야만적으로 진압한 정부는 노동운동 탄압의 고삐를 더욱 조여 가기 시작했다. 특히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자들을 '도산계'라고 이름 붙여 놓고, '도산계'는 국제공산당과 연결돼 있어 기업을 도산시킬 목적으로 산업현장에 침투한 세력이라고 흑색선전을 퍼뜨렸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노동운동을 짓밟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야당인 신민당에 탄압의 칼을 들이댔다. 마침내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기에 이르렀다. 박 정권은 그야말로 말기적인 광기를 부렸다.

아니나 다를까. 79년 10월16일 부산ㆍ마산에서 유신철폐를 주장하는 데모가 거세게 일어났다. 즉각 군대가 투입돼 부산·마산 민중들의 항쟁을 짓밟았다.

이 악독한 독재가 무너져야 노동자들의 고통이 해결될 텐데. 이소선은 그날이 언제 올까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10월26일. 그날도 이소선은 노조사무실에 출근했다. 노조는 조직이 극도로 쇠잔해졌고, 정부는 YH 사건 이후 탄압의 칼을 목에 들이댔다. 너무 힘들다는 생각에 날마다 고민에 휩싸여 지냈다. 낮에 일을 마치고 저녁에는 노동교실에 가서 조합원들을 만나 고민을 함께 나눴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야산 길을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하늘에 초승달이 처연하게 떠 있었다.

'그놈의 달 참 처량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저 달은 차오를 텐데, 우리들의 삶은 어이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까. 하루하루가 팍팍하기만 하고, 태일이가 원하는 날은 아득하기만 하니….'

이소선은 밖에서 활동할 때는 잊어먹지만 집으로 들어갈 때는 으레 집안 살림이 걱정됐다. 징역 살고 나와 보니까 집안 살림은 거덜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은 딸 순덕이가 은행에 다니고 있어 그 월급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가장으로서 책임을 못한 자신은 아이들 볼 면목이 없었다.

'유신독재 때문에 우리 아들 태일이도 죽고 또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으며, 노동자가 탄압을 받고 있다. 우리들의 피와 살을 깎아 먹는 유신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날은 언제일까. 달아 너는 알고 있냐? 속 시원히 내게 말 좀 해 다오. 어째서 노동자들은 매일 당하고만 살아야 하냐?'

이소선은 버릇처럼 중얼거리며 달빛을 따라 걸었다.

'고 박정희' 이제 새날이 오려나

다음날 아침 사무실에 출근하기 전에 빨래를 해 놓으려고 가게에 비누를 사러 갔다. 좌판 근처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 있었다.

"아줌마, 나 비누 좀 줘요."

"이 아줌마가 지금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아니, 비누 달라고 했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무슨 일이 났어요?"

사람들은 그가 묻는 말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이소선도 뉴스를 자세히 들어봤다. 라디오에서는 조용한 음악이 나오고 난 뒤 간간이 "고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나지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 박정희라니? 아니, 그럼 박정희가 죽었단 말이야?'

"죽은 사람한테 고 아무개라고 하는데 박정희가 죽었다는 말이요?"

라디오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얼굴도 돌리지 않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소선은 얼른 비누를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라디오를 자세히 들어보니 박정희가 틀림없이 죽은 것이다.

'우리 노동자를 탄압한 박정희가 죽다니! 박정희가 죽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태일아, 박정희가 죽었단다. 그러면 독재정권이 무너진단다! 우리 노동자들도 어깨를 펴고 살아갈 수 있겠구나. 태일아, 너도 하늘에서 보고 있냐? 이 어미는 너무나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구나.'

이소선은 서둘러 시내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드디어 억눌린 자, 갇힌 자가 다 풀려나올 수 있겠다. 이제는 살았다! 짓눌린 그의 가슴이 확 트였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날듯이 노조사무실을 향했다.

전태일의 얼굴에 조합원들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었다. 이제 새날이 오려나….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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