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세계화 시대에서 한 나라의 정책과 그것의 시행 및 효과는 더 이상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필자는 과거 장기간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 현지 TV토론에서 각각 좌와 우를 대변하는 논자들이 노동시장 정책을 놓고 격한 설전을 벌일 때, 다른 나라의 경우를 인용하면서 독일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 현실을 비판하는 모습을 자주 접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 독일이나 그러한 상황에서 늘 외국의 경험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면모에 초점을 두면서 그를 매개로 주장의 논거를 삼곤 한다. 대다수 청중이나 시청자들은 깊이 있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무지의 공간 속에서 전문가 담론들이 널뛰기를 한다.

이른바 정책번역이론(policy-translation theory)은 어떤 외국의 정책지식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시각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나라에서 특정한 이해와 권력을 지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소극적 혹은 적극적으로 그러한 지식을 자신들의 맥락에 부합하는 쪽으로 선별적으로 다루고 소개할 뿐이라는 시각을 취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사성어 '아전인수' 내지 '장님 코끼리 더듬기' 같은 식의 상황을 급진적으로 보편화시키는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정책을 번역한다는 것은 외국의 맥락(context1) 위에 서 있는 정책 내용(text)을 가져와 우리의 맥락(context2) 위에 놓고 판단하는 주관적 작업이다. 사실상 텍스트 번역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컨텍스트 번역도 함께 이뤄진다. 관건은 텍스트가 기반하고 있는 원래의 컨텍스트라는 게 너무나 풍부하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컨텍스트 위에 그 텍스트를 두면서, 그 나라의 컨텍스트는 펼치고자 하는 주장에 부합하도록 선별적으로 부각되거나 배제되는 일종의 '맥락 취사선택'이 이뤄지곤 한다.

복잡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최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독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이렇게까지 좌우를 막론하고 '독일이 대안적인 체제를 갖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경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중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독일 고용노동정책에 관한 것이다.

원래 한국 좌파들이 독일 고용노동정책을 선호하면서 그 요소를 적극 배우고자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산별노조 시스템이다. 지금은 한국식 단체교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새롭게 일고 있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주된 흐름에서는 대체로 독일식 산별노조와 산별교섭 모델을 이상적 대안으로 굳건히 간주했다. 그러한 지향은 일정하게 한국 노동조합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산별교섭 정착에 이르지는 못했다.

반면 한국 우파에게 독일은 주로 ‘음험한’ 대상으로 백안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별교섭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동결정(co-determination)이라고 하는 “택도 없는” 관행을 논하는 것에 대해 사용자들은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실업자들에게 과분한 복지수혜를 베푸는 노동시장제도의 여러 기제들도 잔여적 복지체제에 기반한 발전국가를 이끌었던 한국 경제관료들에게는 그저 “나라 망치는 지름길”로 간주되곤 했다.

큰 틀에서 이러한 시각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나, 근래에 새로운 모습이 관찰된다. 고용노동정책과 관련해 한국 우파들 입에서 “독일을 보라!”는 소리가 자주 나오는 것이다. 그 핵심 이유는 지난 10여년간 세계를 풍미한 신자유주의 이념에 기반한 정책을 독일도 불가피하게 도입해 갔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노동시장제도에 있어 유연화·효율화를 극대화하기 위해 취한 개혁패키지인 하르츠 개혁의 경우 핵심은 고용서비스 전달체계 활성화였으나, 독일의 ‘사회국가(Sozialstaat)’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과감한 복지축소 의제와 일자리 형태의 다양화를 내포한 것이었다. 하르츠 개혁에 대해서는 평가가 분분하다. 대체로 그것이 2000년대 후반 이후 독일경제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가져다준 핵심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이 우리나라 정책계와 주류 언론계에서 취하는 태도다. 그러면서 이내 ‘신화처럼 숨을 쉬는’ 독일식 유연화의 "고래를 잡으러", "자~ 떠나자!"는 주장이 뒤따르곤 한다.

구체적으로 고용률 70%를 이야기할 때에는 독일의 높은 여성고용률과 시간제 일자리 창출이 비결이었다고 해석하면서, 우리에겐 낯선 형태의 일자리인 ‘미니잡’에 주목한다. 당장 3월까지 기한을 두고 전개되는 노동시장 구조개선 논의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비정규직 개혁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인다. 독일이 하르츠 개혁을 단행하면서 행한 '파견근로에 대한 사유제한 폐지'를 들먹이며, 우리의 비정규직 규제의 과도함을 비판하는 논거로 활용한다.

이런 식의 정책번역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 문제를 지닌다. 하나는 그러한 독일의 정책행위가 매우 독일적 컨텍스트 위에서 이뤄진 선택들이라는 것에 대한 세심한 해석과 설명이 동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컨텍스트 취사선택). 다른 하나는 그러한 선택과 연계돼 이뤄지고 있는 또 다른 경향의 정책행위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결여된 채 일방적 측면만 전달된다는 것이다(텍스트 취사선택).

하르츠 개혁에 대해서는 10주년을 경과하면서 독일 내에서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고 있다. 사실 그것이 독일경제의 르네상스를 이끈 핵심적인 동인이었다는 해석은 여러 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독일과 해외의 전문가들은 그러한 논리적 연계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분석을 적지 않게 제기하고 있다. 가장 빠뜨릴 수 없는 비판은 그것이 초래한 노동시장 양극화와 취약노동계층 양산에 대한 보편적 반성과 성찰이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강하게 대두돼 온 것이 ‘법정 최저임금제’의 보편적 도입이다. 아울러 올해부터 시간당 최저임금 8.5유로(1만1천원)를 지불하는 것이 모든 일자리에서 의무로 관철되는, 노동시장의 엄청난 변화가 최근 독일에서 단행됐다.

이 모든 것들이 무지에 의한 것이든 의도적이든 국내 주요 정책계와 주류 언론계에서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있다. 애당초 정책번역이 주관적인 성격을 띠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나라의 정책을 가져오려면 컨텍스트와 텍스트를 최대한 총체적이고 폭넓게 다뤄야 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