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앤앰 해고자 복직을 위해 새로 설립한 협력업체의 대표 김병수씨(오른쪽)가 지난 19일 임정균·강성덕씨의 입원실을 찾아와 웃으며 얘기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 종합유선방송사업자 씨앤앰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임정균(사진 왼쪽), 강성덕(사진 오른쪽)씨는 50일간 진행된 고공농성 후유증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 정기훈 기자

지난해 11월 서울 광화문 인근 옥외전광판에 두 사람이 올랐다. 이들이 오른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옥외전광판은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 미국·일본 대사관, 서울시청에서 지척이다. 직장인들이 바쁘게 오가는 광화문 네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종합유선방송사업자 씨앤앰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케이블방송 비정규 노동자 임정균(39)·강성덕(36)씨. 그들은 미생(未生)일 수밖에 없는 비정규 노동자의 삶에서 한 걸음 나아가 보겠다고 고공농성에 나섰다. 두 사람이 고공농성 한 뒤 목표가 달성됐다. 아니 눈부신 성과를 냈다. 그간 하청업체 뒤에 숨었던 원청 씨앤앰이 자신을 포함해 3자 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해고자들은 협의체에서 복직의 길을 찾았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으로 보였던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이례적으로 공동파업을 성사시켰다.

그런데 임정균씨와 강성덕씨는 땅으로 내려오면서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스타케미칼과 쌍용자동차에서 고공농성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고공농성장에서 다시 펼쳐 든 <전태일 평전>은 가슴을 찔렀다. 세월은 흘렀지만 세상은 멈춰 있었으므로.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9일 저녁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두 사람은 지난해 11월12일부터 12월31일까지 50일간 진행된 고공농성 후유증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임씨와 강씨는 “고공농성이 노동자 권리를 자각하고, 사고 성장판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인터뷰는 2시간가량 이어졌다. 두 사람은 이튿날 퇴원했다.

"3년 만에 다시 읽은 전태일 평전"

- 현재 몸 상태는 어떤가.

임정균 : 그동안 심리치료를 많이 받았다. 고공농성을 하는 동안 혈압이 불규칙했다. 병원에서 하루 3번씩 혈압을 체크했다. 지금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올라가 있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어지럼증이었다. 입원한 뒤에도 열흘 가까이 시선을 약간 위에만 두면 머릿속이 ‘핑’ 하고 돌았다. 높은 곳에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강성덕 : 위에 있을 때 옥외전광판에서 ‘웅’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바로 편두통이 왔다. 동지들이 매일 올려 보내 준 약을 먹으며 소화불량과 구토감을 견뎠다. 좁은 공간에서 오래 있다 보니 목과 오른팔 삼두근에 통증이 남아 있다. 원래 쾌변 마니아였는데, 농성기간에는 3일에 한 번 겨우 일을 봤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 농성장은 어떤 곳이었나.

임정균 : 대략 가로 9미터, 세로 4미터 정도 되는 공간이다. 윗면의 환풍구를 통해 수리기사들이 드나드는 전광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낮에는 바깥에서 밑에 있는 동지들과 집회·투쟁을 했고, 밤이면 안으로 들어가 바람을 피하면서 쪽잠을 잤다. 전광판은 매일 밤 자정 직전에 꺼졌다가, 다음날 새벽 5시50분에 켜진다. 전광판이 켜지기 전에 10개의 환풍구를 통해 바깥 바람이 안으로 들어온다. 내부 열기를 미리 식히기 위해서다. 한겨울에 찬바람을 모아 안에서 선풍기를 튼 격이다. 너무 추웠다.

강성덕 : 낮에는 집회를 하고 투쟁구호도 외치고 했지만, 형과 단둘이 있는 밤에는 되도록이면 다른 얘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밤에 투쟁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둘이 정한 일종의 금기였다. 밤에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SNS로 소통하며 시간을 보냈다. 전태일 평전을 읽은 것도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근로기준법이 무시되는 현실을 보면 열사가 산화하고 흐른 44년의 세월이 무색한 것 같다.

임정균 : 나도 전태일 평전을 3년 만에 다시 읽었다. 올라와서 보니 처음 읽었을 때 느끼지 못했던 부아가 치밀더라. 노동현실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고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합원들과 해고자들이 겪는 현실이 당시와 별반 차이가 없다. 마음이 너무 무거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고립된 곳에서 농성을 하며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 씨앤앰 협력업체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고사태가 고공농성의 발단이 됐는데.


임정균 : 지난해 6월21일 서울 노원구 원케이블서비스를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5개 업체에서 무려 109명의 해고자가 발생했다. 이후 노숙농성이 시작됐지만 사태가 해결되지 않았다. 해고자는 아니었지만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비정규직지부 전임자로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와서도 사태 해결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마지막에 떠오른 게 고공농성이었다. 실행에 옮기기 2주 전에 말이다. 정작 결심이 서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강성덕 :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는 노조활동을 약화시키기 위한 표적해고였다. 5곳 중 해고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시그마네트워크에서 일했는데, 40여명의 직원 중 비조합원 5명은 고용이 승계된 반면 노조에 가입한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해고됐다. 다른 업체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반복됐다. 해고가 이뤄지기 얼마 전에 지금은 계약이 해지된 시그마네트워크 대표가 씨앤앰에 소송을 걸었다. 매년 소속 직원에 대해 3% 정도의 임금인상이 이뤄졌는데 원청 수수료는 8년째 제자리걸음인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원청이 소송 취하를 요구했지만, 불응하자 본래 계약기간인 8월이 되기도 전에 계약을 해지해 버렸다.

임정균 : 해고사태가 벌어지기 3~4개월 전만 해도 신규업체와 계약할 때 조합원·비조합원 상관없이 고용이 승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노조가 쟁의권을 획득하고 파업 찬반투표를 실시하자 해고사태가 줄줄이 이어졌다.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는 시기에 노조에 칼을 댄 것이다. 사실 협력업체 사장들 중에도 노동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상생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하지만 씨앤앰의 대주주는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다. 정해진 파이를 던져 주고, 싸움을 붙인다. 향후 매각가를 높이기 위해 노조를 잘라 내려 한다는 의혹도 있다. 안타까운 대목이다.

고공농성이 마무리되기 전날인 지난달 30일 원청을 포함한 3자 협의체는 해고자 중 이직·전직자를 제외한 83명의 고용승계에 합의했다. 이날 인터뷰 도중 때마침 복직자들이 몸담을 신규업체인 기가아이앤티의 김병수 대표가 병실을 찾았다. 김 대표는 인터뷰를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블방송 업계, 간접고용 복마전"

-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전광판에 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강성덕 : 고공농성을 시작하기 전 어머니한테 최신 스마트폰을 선물하고,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다. 지방으로 출장 간다고 하고 전광판에 올라갔다. 일주일 후가 어머니 생신이었는데 찾아뵙지도 못했다. 그러다 어머니가 페이스북을 통해 내 소식을 접했다. 매일 우셨다. 고공노성을 결심하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이다. 아버지께서 예전에 택시 일을 하셨다. 6~7년 전 일을 그만두면서 회사를 상대로 퇴직금 소송을 제기했는데, 대법원까지 가서 이겼다. 이런 아버지라면 뒤늦게라도 자식을 믿고 응원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임정균 : 부부는 늘 소통하고 교류해야 하는데 얘기도 못하고 올라와서 미안했다. 원망하던 아내가 전광판에 오른지 10일째 되던 날 통화에서 "기왕 시작했으니 당당하고, 멋있게 하라"고 하더라. 그 얘기를 듣고 어떻게든 이겨서 내려가야겠다고 결심했다.

- 케이블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임정균 : 지금까지 통신·케이블 노동자들의 실태가 제대로 부각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노조활동으로 간접고용 실태가 드러났고, 건설업계 못지않게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병폐가 심각하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졌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기는커녕 일주일에 7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다. 지금은 내부 캠페인으로 사정이 조금 달라졌지만 밤 10시를 넘어서까지 고객 불만을 접수하고, 현장에 출동하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간접고용 탓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강성덕 : 설치기사로 일한 지 올해로 9년차가 되는데, 해고 직전에 받은 임금이 월 190만원이었다. 경력을 감안하면 웬만한 아르바이트를 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생활임금 보장이 절실하다. 갖가지 위험 요소에 노출돼 있는 작업환경도 케이블 노동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사업주는 전기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미리 예방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2인1조 작업, 특수차량 지원도 하지 않는다. 매일 수많은 케이블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다치고 있다.

- 정규직들로 구성된 희망연대노조 씨앤앰지부의 동조파업이 화제였다.

강성덕 :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이라는 생각에 그랬을 것 같다. 과거에는 정규직이 비정규직 투쟁에서 보여 준 행태 때문에 지탄을 받았던 적이 많았다. 대표적인 곳이 쌍용차와 한진중공업이다. 그때마다 지역사회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외면했다. 이제 조직 전반에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의식이 퍼진 것 같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한데 모은 투쟁이 앞으로 민주노총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 아닌가 싶다. 그래야 정권이 민주노총을 두려워할 것이다.

임정균 : 씨앤앰지부는 우리의 일을 자신들의 일처럼 생각했다. 화까지 내면서 ‘연대’라는 단어도 쓰지 말라고 했다.(웃음) 자신들에게 닥칠 일을 바로잡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비정규직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노동정책으로 인해 파생된 하나의 결과물이다. 정규직이 욕심을 내는 순간, 갈라치기를 당할 수밖에 없다. 노조가 조직화하는 과정에서부터 간부들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내리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모습이 노동자 사이를 가로막은 벽을 허물게 한 것 같다.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에서 일하는 통신업계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장기화하고 있는데.


임정균 : 통신 노동자나 케이블 노동자나 비슷한 현실에서 일한다. 힘내고, 지지 말고, 견디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자본은 힘없는 노동자들의 피를 말려 가며 싸움을 이어 가려 할 것이다. 정말 해야 할 일이라면 포기해선 안 된다. 포기하는 순간 그동안 해 왔던 투쟁은 모두 원점이 된다. 노조활동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한데,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힘들게 싸워 왔지만 앞으로가 더 힘들 수 있다. 미리 겁먹고 지레 포기하지 말고, 그 싸움이 몇 년 걸리더라도 정말 바꾸고 싶은 환경이라면 견뎌서 꼭 이기라고 말해 주고 싶다.

- 고공농성을 전후해 스스로 변한 게 있다면.

강성덕 : 2년 전 의경 출신인 동생이 집회에서 노동자들과 충돌을 빚어 다친 적이 있었다. 노조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몇 년 새 달라진 것을 보면 놀랍다. 드라마 <미생>이나 영화 <카트>에 나오는 현실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우리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전광판에 올랐다. 그러자 기자들과 카메라가 왔다. 이기기 전까지 내려가지 않겠다고 각오했다.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50일간의 농성 끝에 이제야 노동자라는 자각이 생긴 것 같다. 앞으로도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임정균 : 위에서 보니 광화문 네거리는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모두 무언가에 쫓기듯이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핸드폰을 쳐다보며 길을 걸었다.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보니 안타까웠다. 고공농성을 마치고 나서야, 내가 나이를 먹고 생각의 성장이 멈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고의 성장판이 다시 열린 기분이다.

-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나.

임정균 : 지금껏 해 왔던 대로 할 것이다. 고공농성은 투쟁의 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불만을 갖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조합원들과 소통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단단한 노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러다 현장으로 돌아가면 설치기사 일에 충실할 것이다.

강성덕 : 우리가 내려왔다고 모든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스타케미칼과 쌍용차 해고자들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집회에 참여하면서 연대할 것이다. 케이블방송비정규직지부 정책팀장을 맡고 있는데, 케이블 노동자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빨리 장가를 들어 그동안 걱정만 끼쳤던 부모님께 손주를 안겨 드리고 싶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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