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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니 또 터졌다. 지난달 말 학습지노조 조합원들이 검찰로부터 유전자(디엔에이) 정보 채취 요구를 받았다. 노동운동을 하다 실형을 받았기 때문에 디엔에이 채취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미 쌍용자동차 해고자와 용산참사 유가족,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한국지엠 노동자와 시민이 디엔에이 채취를 요구받았다. 그리고 학습지교사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 국가는 왜 노동자들에게 디엔에이 정보를 요구하는 것일까.

항의방문·농성장에서 사측과 충돌한 죄?

“2007년 학습지노조 한솔교육지부 조합원이 부당해고를 당했다며 1인 시위를 벌였어요. 저와 조합원들이 한솔교육 본사와 교육장에 항의방문을 갔죠. 진입을 막는 사측과 10여분간 충돌했습니다.”

학습지노조 서울경기남부지역본부장이었던 강종숙씨를 포함해 조합원 4명이 당시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돼 지난해 10월30일 대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폭력행위처벌법) 위반이 이유였다. 이후 서울서부지검에서 "디엔에이 채취 대상이니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조합원 김성열씨는 2013년 12월 인천지검으로부터 디엔에이 채취 요구를 받았다. 그해 11월 대법원에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자마자 연락이 왔다. 사건은 선고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12월 한국지엠 비정규 노동자들이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한국지엠 부평공장 서문 위에서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한국지엠 노동자와 시민들이 농성자들에게 저녁식사를 올려 주는 과정에서 용역경비대와 충돌이 빚어졌다. 용역경비대는 낫을 휘두르며 식사 올리는 것을 방해했다. 노동자·시민은 행사용 플라스틱 파이프를 들고 대항했다. 노동자·시민 4명이 폭력행위처벌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김성열씨는 “플라스틱 파이프를 든 것은 상해죄로 보면서 낫을 든 용역경비대에는 아무 죄도 묻지 않았다”며 “디엔에이 채취라니 인권유린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종숙씨와 김성열씨는 디엔에이 채취에 동의하지 않았다. 검찰은 영장을 발부하겠다고 압박했지만 이들은 해당 사실을 언론에 알리며 끝까지 거부했다. 현재 이들에 대한 디엔에이 채취는 유보된 상태다.

서울서부지검 관계자는 “처음부터 디엔에이 정보를 채취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며 “(유보는) 대검찰청과 논의해서 결정한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조두순 사건에서 비롯된 디엔에이법

노동운동으로 실형을 받은 노동자의 디엔에이를 채취할 수 있도록 한 근거 법령은 2009년 제정돼 2010년부터 시행된 디엔에이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디엔에이법)이다.

2008년 조두순은 초등학교 1학년생 여아를 납치해 성폭행하고 신체를 훼손한 혐의로 구속돼 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여론은 들끓었다. 디엔에이법이 제정된 배경이다. 정부는 “디엔에이법이 시행되면 흉악범의 신속한 체포와 재범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그 대상으로 11개 주요 범죄를 제시했다.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을 포함해 △살인 △강간·추행 △강도 △방화 △약취·유인 △상습폭력 △조직폭력 △마약 △특수절도 △군형법상 상관살해가 주요 범죄에 포함됐다. 이들의 디엔에이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영구 보관하고 재범발생시 즉각 수사에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흉악범이나 조직폭력배 수사에 활용하기 위해 디엔에이를 채취하겠다던 디엔에이법이 난데없이 노동자들을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디엔에이법은 폭력행위처벌법(제3조) 위반자를 적용대상으로 한다. 폭력행위처벌법 제3조는 “단체나 다중의 위력으로써 폭행·협박·주거침입·퇴거불응·재물손괴 죄를 범하거나, 흉기나 그 밖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해 그 죄를 범한 사람을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흉악범죄은 아니지만 주거침입이나 퇴거불응은 노조의 항의방문·집회·시위·농성장에서 언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디엔에이법 인권침해 논란 ‘현재 진행형’

디엔에이법은 제정 단계부터 인권침해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시민·사회단체는 “국가가 방대한 디엔에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며 “범죄자뿐 아니라 그 가족과 지인, 범행현장에 머물렀던 시민이나 피해자도 포함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들은 “디엔에이는 민감한 개인정보인 만큼 수사상 필요하더라도 영장에 기초해서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불응시 강제적 방법을 취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검경은 피채취자의 동의를 받도록 하되 불응하면 영장을 받아 강제집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검사의 영장청구 적법성을 판단할 기준이 없다. 영장주의에 반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디엔에이법은 2011년 헌법소원의 대상이 됐다. 용산참사 유가족 4명과 쌍용차 노동자 1명이 디엔에이 정보를 채취당한 것이 발단이었다. 일부는 수감 중 디엔에이 채취를 거부했다가 영장에 의해 강제로 채취당했다. 일부는 검찰에 자진 출석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당시 의견서에서 “디엔에이 채취 대상 범죄로 적절하지 않은 범죄를 포함한 데다, 재범가능성이 없는 경우도 특정 범죄를 범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률적으로 채취될 가능성이 있다”며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권고했다. 무죄추정 원칙 위반 가능성이나 영장주의 형해화 우려도 제기됐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8월 “디엔에이법은 합헌”(합헌 5명·위헌 4명)이라고 결정했다. 디엔에이법이 영장주의 위배가 아니며 기본권 침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와 관련해 위헌 입장을 낸 헌법재판관은 “주거침입·재물손괴 등 폭력행위처벌법 위반죄는 상대적으로 죄질이 경미하고 재범 위험성이 높지 않다”며 “행위자별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지 특정범죄 전력만 갖고 도식적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고 밝혔다.

디엔에이법 개정 시급 … 노동계 관심 가져야

“검찰로부터 연락이 안 온 지 1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불안합니다. 언제 갑자기 채취하겠다고 연락이 올지 모르잖아요. 흉악범도 아니고.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죠.”

2010년 한국지엠 충돌 현장에 있었던 신현창 전 금속노조 한국지엠 부평비정규직지회장도 디엔에이 채취를 요구받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서기호 정의당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8월 현재 검찰이 채취한 디엔에이 정보 중 99.6%는 판사의 영장 없이 동의서만으로 채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피채취자들이 강행규정이 아니라는 점을 제대로 고지받지 못하고 디엔에이 채취 의미에 대해 사전설명을 듣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주변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디엔에이법에 따른 인권침해가 현실화하면서 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신훈민 변호사(진보네트워크센터)는 “디엔에이 채취 여부에 대한 판단은 판사에게 맡겨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당사자가 참여해 디엔에이 채취 대상인지를 다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현창 전 지회장은 “디엔에이를 채취하는 데 반대한다”며 “다만 법 취지에 맞게 개정한다면 그 대상을 엄격히 제한하고 시료보관 기간을 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독일·스웨덴·벨기에·네덜란드는 시료보관 기한과 삭제규정을 두고 있다. 현재 야당과 법조·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디엔에이법 개정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다.

법 개정에 앞서 당장의 피해를 줄이려면 적어도 노동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이 디엔에이 채취를 요구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훈민 변호사는 “디엔에이법은 강행규정이 아닌 만큼 검찰이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다”며 “노동계 역시 디엔에이 채취·CCTV 감시 같은 노동자 개인정보 수집에 대해 적극 관심을 갖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 연윤정 기자
“지난해 11월 중순 서울서부지검에서 전화가 왔어요. 유전자(디엔에이) 채취 대상자니 와서 받고 가라고요. 무슨 소린가 했어요. 잘못 온 줄 알았죠.”

지난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능교육 본사 앞 농성장에서 만난 강종숙(45·사진) 전 학습지노조 위원장은 “기가 막히다”고 했다. 그는 “노동운동을 하다 실형을 받았다고 해서 민감한 개인정보인 디엔에이 채취를 요구하는 게 말이 되냐”고 따져 물었다. 디엔에이를 채취하는 취지는 강도·강간 등 흉악범을 신속히 체포하고 재발방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했다.

2007년 학습지노조 조합원 20여명은 한솔교육지부 김아무개 조합원의 부당해고에 항의하기 위해 한솔교육 본사와 교육장을 찾아갔다가 사측과 충돌했다. 강 전 위원장은 당시 서울경기남부지역본부장이었다.

“10여분간 욕설과 실랑이가 오갔어요. 경찰 중재로 중단되고 우리는 철수했습니다. 그 뒤 사측이 주거침입·업무방해·퇴거불응·폭력·상해 등 혐의로 고소했죠.”

대법원은 지난해 10월30일 강 전 위원장을 포함해 조합원 4명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폭력행위처벌법) 위반 혐의였다. 디엔에이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디엔에이법) 적용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피고인들이 학습지노조 간부로 활동하면서 건조물 침입이나 업무방해가 폭력적이지 않았고 학습지교사의 권익을 위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고 인정했다.

“조합원 4명 중 2명은 학습지교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깜짝 놀라더라고요. 7년 전 사건으로 디엔에이를 채취하고 불응시 영장 발부까지 한다니 말이죠.”

서울서부지검은 지난달 22일 강 전 위원장에게 보낸 출석안내문을 통해 “귀하는 디엔에이법에 따라 디엔에이 시료 채취 대상자”라며 “지속적인 채취 거부시 영장이 발부될 수 있다”고 예고했다.

“학습지교사를 그만둔 한 조합원은 ‘현직이 아닌데 왜 대상이 되냐’고 묻더군요. 학원을 운영하며 어린 자녀를 둔 또 다른 조합원은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떨더라고요. 학원 허가가 취소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강간범 취급을 받는 건데 어떻게 동의할 수 있냐고 말입니다.”

지난달 해당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서울서부지검은 입장을 바꿨다. 강 전 위원장을 포함한 4명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당분간 유보한다”고 알렸다. 강 전 위원장은 “전화통보 뒤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면서도 “검찰이 언제 어떻게 입장을 바꿀지 알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실제 강 전 위원장은 학습지노조 활동으로 여러 건의 소송이 걸려 있다. 그는 “지금도 검찰이 수배를 내리면 모르는 것 아니냐”며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다른 소송과 관련한) 수사를 받으러 갈 때마다 압박감이 심하다”고 토로했다.

“디엔에이법은 제정 당시부터 인권침해 우려가 컸는데 결국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요.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디엔에이법 합헌 결정까지 해서 우려가 더 큽니다. 디엔에이법의 심각성에 대해 사회적 여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어요. 신속한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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