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정부의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2006년 이른바 비정규직법 제·개정 이후 검증된 사실마저 애써 부인한 부실한 대책이 핵심이어서 정부의 역할이 다시 한 번 도마에 올랐다.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과 파견허용업종 확대는 연령대 제한을 무색하게 하는 비정규직 양산 방안일 뿐이다.

비정규직 노조 가입률을 높이지 않고서는 백약이 무효임이 분명한데도 노동기본권 신장의 관건이라 할 원청 사용주의 사용자성과 특수고용 비정규직 노동자성 인정은 아예 빠졌다. <미생>과 <카트>와 <송곳> 등 대중적 관심사로 부상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정부의 관점은 여전히 비정규직 당사자가 아니라 기득권층인 사용주들 편에 서 있다. 모범사용자로서, 사회 갈등을 조정해야 할 최종 책임자로서 정부의 근본적인 각성과 인식 전환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이 시점에서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가 주저앉은 지점이 어디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공공부문은 미흡하게나마 상시·지속업무 정규직화를 기본원칙으로 정규직 중심의 일자리 구조로 나아가고 있다. 모범적인 비정규직 정규직화 모델을 만들어 온 서울시는 민간위탁 업무인 다산콜센터 상담사들의 직접고용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중앙정부가 지지부진한 사이 '서울 효과'로 불리는 지방정부 차원의 비정규직 개선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가 가장 난항에 부딪힌 곳은 바로 민간부문이다.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특히 4대 재벌의 전근대적 행태가 심각하다. 헌법이 보장한 국민기본권인 노동 3권마저 공공연히 무시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진다.

재계 선두 삼성그룹은 무노조경영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위헌경영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대기업집단이 국민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것만큼 위험한 국기 문란은 없다. 우선 준법 수준에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삼성전자서비스 비정규 노동자들은 열사들의 목숨값으로 쟁취한 기본 단체협약 체결 이후 단 하루도 맘 편할 날 없이 노동조합 탄압 속에서 현장투쟁을 이어 가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더 노골적이다.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을 정면으로 묵살하는 신규채용 꼼수로 일관해 왔다. 10년을 넘긴 피어린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을 공권력의 비호 아래 폭력으로 짓눌렀다. 한국 최대의 제조업 기업 안에서 법원의 권위는 남김없이 유린당했고, 비정규직 노동인권은 설 자리를 잃었다.

SK그룹과 LG그룹도 다르지 않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간접고용 비정규직 투쟁이 두 그룹 산하 통신대기업인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3월 비정규직노조가 설립된 이후 두 그룹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국경총을 앞세워 시간끌기로 노동조합 말살을 획책하고 있다. 엄동설한 장기파업과 노숙농성으로 생계난과 건강악화로 심각한 지경에 처한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은 안중에도 없이 기존에 합의한 내용마저 뒤집고 있다.

불법적인 다단계 하도급 구조 속에서 근로기준법과 노동관계법은 증발해 버렸다. 매일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현장에서는 고용노동부의 무사안일한 감독 아래 불법 부당노동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체 노동시장의 표본이 되는 4대 재벌의 사회적 책임은 대단히 무겁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 충분한 여력을 가지고 있고 관련된 비정규직 일자리의 규모도 가장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 파급 효과를 따지면 더욱 비중이 커진다. 그런데 4대 재벌의 행태는 사회적 책임의 대척점에 서 있다. 고용창출 기여도도 미미하고, 심지어 직접고용해야 할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간접고용 비정규직을 양산해 온 주범이기 때문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최태원 SK그룹 회장 가석방 주장은 우스꽝스럽다. 집권여당 대표가 먼저 눈길을 둬야 할 곳은 횡령·배임 비리로 죄과를 치러야 할 총수가 아니라 4개월 넘게 찬 길바닥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정부가 실질적인 개선을 도모할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낼 요량이라면 4대 재벌의 비정규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번 대책에서처럼 원청 사용주의 책임을 면제하는 역주행 정책이 아니라, 불법파견을 비롯한 악질적인 행태에 철퇴를 가하고 원청 사용주의 책임을 확대 강화하는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미 전국적 쟁점화가 돼 있고 지속적으로 노사 간 핵심 현안이 되고 있는 4대 재벌의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를 먼저 해결하자. 그럴 때만이 정부 대책에 대한 합리적 공론화도 가능해질 것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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