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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57] 수원교도소 징역살이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이소선은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을 보기 위해 교도관들과 용을 쓰느라 화장실에 가는 것도 잊어버렸다. 오줌 누는 것을 억지로 참고 수원까지 갔는데, 수원에서도 번호를 받고 배방 받느라 시간을 넘겨 버렸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려고 아무리 힘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병이 돼 버렸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처지였는데 수원교도소는 방 안에 화장실이 없었다. 소변은 커다란 빨간통을 사용했는데 대변은 방 안에서 처리를 할 수가 없었다. 모범교도소로 지어 놓은 교도소가 화장실조차 없어 변을 보는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간에 볼일을 봐야 했다. 똥이 시간 맞춰서 나올 리는 없고, 급하기는 한데 억지로 참자니 이 또한 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이날따라 설사가 났다. 자다가 똥을 쌀 수가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누구한테 호소도 할 수 없었다. 온몸에서 땀이 쏟아지고 전신이 조여드는데 생전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이소선은 생각하다 못해 옆 사람이 눈치 채지 않게 조용히 일어나 잡수물통으로 쓰는 구박을 자신의 담요 속에 넣었다. 구박 안에다 빵봉지를 깔아 놓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똥을 쌌다. 이 똥을 빵봉지에 싸서 다시 휴지로 싸고 팬티로 둘둘 말았다. 이튿날 아침에 이것을 고쟁이에 담아 화장실에 갖다 버렸다.

이런 일이 또 한 번 닥친다면 정말 못살 것 같았다. 하도 고통스러워서 그날 밤에 이소선은 혼자 막 울어 버렸다. 대변도 자유롭게 볼 수 없는 이 지긋지긋한 생활, 이게 지옥이지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인가.

이게 지옥이지 사람 사는 세상인가

이소선은 밥도 못 먹고 낙심해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엄마, 엄마! 왜 콩밥을 안 먹고 계세요? 또 아프세요?'

태일이는 관 속에서 '하나 둘 셋'하며 힘을 쓰더니 관짝을 들치고 벌떡 일어섰다.

'그래 죽은 사람도 이렇게 살려면 살아갈 수 있는데, 엄마는 여기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시는지요? 눈물 흘리고 밥도 안 드시면 되겠습니까? 나하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벌써 약속을 못 지키시는가요?'

태일이는 어머니 이소선을 마구 꾸짖었다. 이소선은 뭐라고 말을 하려고 용을 쓰다가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모두들 잠을 자고 있는데 나만 깨어나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일까. 다른 사람은 다 사는데, 왜 나만 병들고 못산다고 잠을 못 이루면서 수선을 피우는 것인가. 내 의지가 약해진 것일까. 내가 또 잊을 뻔했어, 태일이가 항상 내 곁에 있다는 것을…. 힘들어도 참고 징역살이를 이겨 나가자.'

이소선은 허약해진 몸을 지탱하며 징역살이를 넘기고 살았다. 그런데 또 병이 났다. 밥도 못 먹고, 물조차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데다 이들 방에 정신질환자까지 들어와서 소리를 지르니 더욱더 견디기 어려웠다.

정신질환자 때문에 교도관들은 다른 때보다 시찰을 자주 했다. 특히 한밤중에 그 정신질환자가 무슨 사고라도 저지르지 않을까 해서 밤중에도 자주 들여다봤다.

이소선은 그날 밤에도 등허리가 당기고, 소화가 안 되고, 뒷골이 쑤셨다. 온몸이 아파서 다른 사람들이 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조용히 기도를 했다. 그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늘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기도를 한참 하고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됐다 싶어 다시 자리를 정리하고 누우려는데 시찰구에서 그를 쳐다보는 눈이 있었다. 그 눈과 이소선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잎사귀 세 개짜리(교사)인 김 부장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이소선을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교회 다니세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예, 교회 다닌 지 오래 됐소."

김 부장은 그날 밤부터 이소선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성의를 다해서 그를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아마 이소선의 신분장을 봤을 것이다. 그녀의 배려로 이소선은 가끔씩 교회당에 가서 예배를 보기도 했다.

낮에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출역’을 하기 때문에 이소선 혼자만 방 안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나도 일을 하러 가겠다"고 여러 번 얘기했다.

얼마 뒤 김 부장이 손을 썼는지 이소선도 출역을 하게 됐다. 표지에 풀을 붙이고 봉투를 만드는 일이었다. 낮에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갇혀 있는 것보다 백 번 천 번 좋았다. 그런데 출역 나간 지 닷새째였다. 담당교도관이 출역을 나오지 말라고 했다.

"왜 다른 사람은 다 출역을 하는데 나만 안 시켜 주는거야?"

이소선은 사람들 속에 섞여 일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유를 따졌더니 담당교도관이 보안과에 알아보라고 했다. 즉시 보안과장을 만났다.

"왜 나만 출역을 내보내지 않는 거요? 내가 무슨 큰 죄를 저질렀다고 나만 안 내보내는 거요?"

"당신은 요시찰이기 때문에 출역을 나갈 수가 없어요. 공연히 다른 사람들까지 선동해서 일을 못하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오."

"내가 언제 선동을 했다고 그러는 거요? 한 달에 55원을 줄 바에야 그냥 시키지, 55원은 뭐 하러 주느냐는 말을 두고 선동했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게 무슨 선동이란 말이요?"

"선동을 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선동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사회에서 그런 일에 종사를 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어찌 됐든 요시찰은 출역을 시킬 수가 없소. 만약 일이 잘못돼서 납품에 차질이 생기면 낭패 아닙니까?"

보안과의 방침은 확고했다. 결국 출역하는 것도 못하게 돼 버렸다.

깊어지는 병세, 은인 만나 버텨

이소선이 구속되기 전부터 앓았던 병들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자신의 병은 자신이 잘 안다. 병명을 꼬집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온몸이 당기고 가끔씩 마비가 돼 머리가 아프고, 가슴에서 불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그런 병이다. 그런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어떤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를 스스로 체득했다. 이소선의 단골로 다니는 약국에서 지어 먹던 약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사회에서 먹던 약을 영치시켜서 먹는 일이 워낙 까다로워서 아예 포기하는 것이 속 편할 지경이었다. 밖에서 약을 들여와서 먹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지자 이소선의 병은 갈수록 심해져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다. 너무 통증이 심해 김 부장한테 그가 조용한 시간에 은밀히 부탁을 했다.

"김 부장, 내가 이 병으로 아프면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 약을 못 먹으면 아파서 살 수가 없어요. 어렵겠지만 나를 도와줄 수 있겠소?"

이소선은 며칠 전부터 밥도 못 먹고 퍼져서 누워 있었다.

"방법을 한번 모색해 봅시다. 내가 심부름을 할 테니 누구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낮에는 모든 사람들이 출역하기 때문에 온 사동에 김 부장과 이소선 둘만 남게 된다. 그래서 비교적 자유롭게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우리 딸 순옥이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면회를 오는데 순옥이를 만나서 얘기하면 될 거요."

"알았어요. 제가 따님을 만나지요."

그렇게 해서 이소선은 김 부장의 배려로 약을 먹게 됐다. 약을 먹고 상당히 좋아지긴 했지만 이른바 '징역병'이라는 것이 그를 괴롭혔다. 가장 괴로운 것은 대변을 보고 싶을 때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김 부장을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김 부장이 말했다.

"밤에 문을 두들기면서 똥이 마려워 죽겠다. 배가 아파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세요. 그러면 내가 문을 열어 드릴 테니까요."

김 부장이 문을 열어 주려면 높은 사람한테 얘기할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소선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김 부장이 담당하는 날은 한밤중에도 방 밖으로 나가 주사도 맞고, 대변도 보고, 약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픈 사람, 정신질환자를 위해 이소선이 기도를 해 줄 수도 있었다. 김 부장의 도움으로 징역살이에 적응해 나가자, 이소선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덩이 같은 것이 차츰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한번은 김 부장이 담당하는 날이었다. 이소선이 폐방 이후에도 바깥에 나가는 것을 같은 사동의 다른 죄수들이 높은 사람들한테 고자질을 했다. 이소선이 요시찰이기 때문에 같은 방 사람들한테도 그에 대한 정보를 일러바치게 하고, 특혜를 주면서 이소선 몰래 사전에 수작을 꾸며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같은 처지의 수인들 때문에 어느새 소문이 나돌아 김 부장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날이 갈수록 소문은 부풀려졌다. 김 부장이 이소선 때문에 사직서를 쓰게 됐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김 부장이 자신한테 몰래 약을 갖다 줬기 때문에 권고사직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소선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김 부장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약을 갖다 주지 않고, 주사를 맞게 해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과연 살아날 수 있었을까. 김 부장은 이소선을 호의적으로 대했고, 힘닿는 데까지 보살펴 줬다. 그런 생명의 은인이 지금 곤란을 당하고 있는데 이소선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죽는 일이 있어도 그녀를 사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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