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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독하게 버텨야' 기본권 찾는 세상
김재광
공인노무사
(노무법인 필)

공인노무사로 일한 지 꽤 됐지만 요즘 들어 상담하는 일이 곤혹스럽다. 이유인 즉 노무사로 일한 십수년 전보다 상담 내용이 더 어처구니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담을 하다 보면 경제규모가 세계 10위를 넘나들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오르내린다는 뉴스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밖에 안 들리고, 오히려 신물이 난다.

규모가 꽤나 큰 찜질방에서 일한다는 여성노동자가 아주 난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는 근로계약서도 취업규칙도 구경해 본 적이 없다. 새로 온 관리자는 정년이 도입됐으니 나가라고 한단다. 사장은 한 달에 한 번 보기도 어려워 사실상 새로 온 관리자가 전권을 쥐고 있다. 정년에 대한 문서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 정년이니 나가라는데 희한하게도 사직서를 쓰라고 한단다.

“그냥 다닐 때까지 다니세요. 근로계약서도 없고, 취업규칙도 없으니 오히려 그렇게 불리하지만은 않습니다. 전에는 쭉 그런 것과 상관없이 다녔다면서요. 그리고 정년인데 사직서를 굳이 쓰라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렇게 조언을 했고, 그는 계속 일을 하고 있다. 단, 관리자로부터 숱한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감내하면서 말이다. 몇 달 뒤 그 찜질방의 또 다른 여성노동자 둘이 똑같은 상담을 했다. 나는 똑같은 조언을 했고, 그들은 “그 언니는 독해서 다니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한다”고 하고선 급히 상담실을 나섰다. ‘독하다’는 말이 한동안 상담실을 맴돈다.

또 한 무리의 노동자들을 상담했다. 이들은 50여명 가까이 일하는 조립 하청공장에서 일한다. 이 정도면 그리 작은 편은 아니다. 사장은 지금까지 일한 퇴직금을 80~90%만 주겠다고 한다. 앞으로 자신과 계속 일하려면 그렇게 하란다. 심지어 불만 있으면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라는 말까지 한다. 이런 식의 중간정산은 부당한 것이고, 나아가 고용을 미끼로 퇴직금을 삭감하는 것 역시 위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는 상담의 주요 내용은 지금까지의 정확한 퇴직금 규모다. 사장의 계산법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이미 10~20%는 깎아서 받을 요량이다. 그러면서 어디서 들었는지 회사가 나중에 위장폐업하면 이것마저도 못 받는다는 불안과 관계기관에 진정해 봤자라는 불신, 법적 다툼이 일면 일자리마저 보존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전하고는 자리를 비웠다. 독하지 않고는 그렇게 못한다는 말을 남기고. ‘독하다’가 다시금 상담실을 비실비실 맴돈다.

대다수 노동자가 이런 경험을 한다. 사용자 부당행위의 답은 노동자가 독하게 버틸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돼 버린다. 법률 분쟁부터 시작해서 굶고, 굴뚝에 올라가고, 바닥을 기고, 독하지 않으면 대항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들에게 법이든 상식이든 정의든 뭐든 그런 것이 승리한 경험은 너무도 가물가물하다. 힘을 동반한 탈법과 비상식, 그리고 부정함이 온통 승리하고 방조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담 얘기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흔히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라고 흥분한다. 지금은 이런 ‘거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세상이 아니라는 셈인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이 바로 이런 세상이다. 지금이 이런 세상이라는 것을 일부러 외면하니까 자꾸만 엉뚱한 해법만 내놓는 것이다.

대다수 노동자가 바라는 간단하고 확실한 답이 있다. 노동부를 위시한 정부가 현행 노동법을, 노동인권을 농락하는 사용자를 단호히 대처하는 데 진정으로 에너지를 쏟는다면,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동관서를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노동자의 권리는 상당 부분 신장될 것이다. 언제까지 기본적인 권리를 찾는 노동자를 ‘독할지, 말지’의 기로에 서게 할 것인가.

김재광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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