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역사연구가

2014년이 채 지나기 전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쿠바와의 수교를 전격 선언했다. 1961년 쿠바 혁명으로 단교 조치가 내려진 지 무려 53년 만의 일이다. 곧이어 쿠바 수도 아바나 곳곳에 성조기가 내걸렸다.

쿠바는 북한·이란 등과 함께 대표적인 반미 국가로 분류돼 온 나라다. 과연 쿠바는 미국과 수교함으로써 반미 대열에서 이탈한 것일까. 쿠바가 미국과 수교를 성사시켰던 바로 그즈음 북한과 미국은 소니 해킹사건을 둘러싸고 극도로 날을 세우고 있었다. 절친한(?) 동맹국인 북한과 쿠바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완전한 엇박자를 보인 셈이다.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진보진영 일각에 자리 잡아 온 이른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 노선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NLPDR은 본디 60년대 베트남에서 정립된 것으로, 이후 북한을 거쳐 진보운동에 유입된 전략노선이다. 그 요체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노동계급의 영도 아래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 속에서 민족해방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진영이 건재하다는 중요한 전제가 깔려 있다. 미국에 대한 예속의 사슬을 끊어 버리고 사회주의 진영에 합류함으로써 완전한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91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초강대국 소련이 허망하게 붕괴하면서 냉전체제가 해체됐다. 그에 따라 사회주의 진영이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NLPDR의 필수 전제가 무너진 것이다.

냉전체제 해체가 미친 영향은 참으로 거대하고도 심각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북한과 쿠바 등의 예에서 확인되듯이 해방이 아니라 국제적 고립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축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재앙에 가까운 것이었다.

변화된 조건에서 추구할 수 있는 목표는 미국에 대한 예속의 사슬을 끊는 것이 아니었다. 거꾸로 미국과 적대 관계에 있던 북한과 쿠바은 대미관계 개선을 집요하게 추진했다.

그동안 북한은 핵과 장거리 로켓 개발을 둘러싸고 미국과 첨예한 대결을 벌여 왔다. 북한이 이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궁극적 목표 역시 대미관계 개선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200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도 9·19 합의로 기대됐던 대미관계 개선이 제때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빚어진 과중한 스트레스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냉전시대에 풍미했던 ‘친미냐 반미냐’라는 구도도 액면 그대로 적용하기 힘들어졌다. 변화된 조건에서 한반도가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외교전략은 주변 4대 강국에 대한 등거리 자주외교였기 때문이다. 미국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나 거꾸로 미국을 배타시하는 것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냉전체제 해체는 이전 시기와 이후의 시기를 뚜렷이 구분해야 할 만큼 근본적인 환경 변화를 야기했다.

NLPDR을 액면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다. 폐기하거나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친미냐 반미냐 하는 도식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미국을 철천지원수로 취급했던 북한과 쿠바가 미국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또 다른 사투를 벌이는 시대다. 이런 점에서 쿠바가 미국과 수교를 맺은 것은 오랜 숙원을 푼 것이다. 박수로 축하해야 할 일이다. 주변에는 북한이 미국과 장기간 맞대결을 벌이는 것을 두고 환호하며 박수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당사자인 북한은 이 과정을 몹시 피곤하게 기억하고 있다. 서둘러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 잘 알고 대했으면 한다.

을미년 양띠해가 밝았다. 양은 공동체성이 강한 동물이다. 추울 때면 달라붙어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여 준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양치기가 양떼를 몰고 가는데 개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양떼는 개울 건너기를 거부하고 뒷걸음질 쳤다. 과연 양치기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 양치기는 가장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슴에 안고 개울을 건넜다. 그러자 양떼들이 일제히 개울을 건넜다. 한 마리의 어린 양을 돌봐야 한다는 공동체성이 양떼들을 움직인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양과 같은 공동체성이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나 갖고 있다. 공동체성의 핵심은 양떼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약자를 보듬고 감싸 주는 것이다. 냉혹하기 그지없는 국제사회에서도 그러한 공동체성이 얼마간이라도 풍겨 나길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가까워지는 법이다. 아무쪼록 북미 간의 극한 대립이 관계개선의 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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