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 칼럼니스트 겸 작가

남편과 나는 직업은 물론 기질상 중독에 매우 취약한 사람들이다. 하기야 남자는 그림 그리는 화가고 여자는 글 쓰는 작가다. 퇴폐에 끌리고 금기에 저항하는 자기 기질과 취향에 도취된 보헤미안 예술가의 후예들. 한때는 술이 ‘존재의 결빙을 녹이는 마법의 음료’라고 찬양하던…. 아인슈타인 같은 지성인에게는 물론 사형대로 올라가는 죄수에게조차도 지상에서의 마지막 위안을 주는 영혼의 친구라며 담배 한 개비를 더욱더 애틋하게 여기던…. 하지만 다 지나갔다. 그런 정신 나간 청춘의 호시절은.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흡연은 목숨을 건 도박이다. 게다가 난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담배를 팔아 엄청난 액수의 돈(혹은 세금)을 챙기는 자들의 ‘호구’가 되고 싶지 않다. 결코. 무엇보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내가 싫다. 그건 술도 마찬가지다. 마흔 넘은 후줄근한 중년의 알코올 중독자라니. 인생에서 받은 상처가 술로 보상될 리 만무하다. 건전한 취미나 정열을 갖지 못한 불쌍한 족속들인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자기 통제력을 잃은 무기력한 술꾼이 문득문득 필연적으로 느끼기 마련인 자기 혐오감. 지옥이 별게 아니라 그게 지옥이다.

새해마다 하는 금연 선언, 어찌나 담배를 자주 끊었던지 이제는 민망할 지경이다. 그 지긋지긋하게 신물 나는 작심삼일과는 차원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새해맞이 두 주 전부터 우리 커플은 금연에 돌입했고 내친김에 술까지 내몰았다. 경험상 술이 금연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걸 결코 간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두 사람은 술과 담배 따위 평생 끊고 살아도 조금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람들이다. 너무 많으니까. 기꺼이 중독되고 싶은, 이미 얼마간 중독된, 그러나 끊고 싶지 않고 결코 끊을 이유도 없는 무해하게 유혹적인 것들. 독서, 음악 듣기, 영화 보기, 산책하기, 차 마시기, 요리와 미식, 여행, 공상 등. 어쩌면 대기표 같은 걸 받아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술과 담배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무대에 오를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친구들의 행렬.

그래도 그렇지. 크리스마스이브를 담배는 물론 와인 한 잔 없이 뜨개질을 하며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생각해 봐. 스무 살 이후 처음일 거야. 술과 담배 없는 크리스마스는…. 정말 특별한 크리스마스지. 안 그래?” 남편 말에 내가 동의한다. “패티 스미스가 그러더라. 자기 아버지가 70세 넘어서 그러더래. 본인한테 뜨개질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새로 발견했다고. 그 일화가 이상하게 두고두고 사랑스럽게 느껴졌거든. 이제 알겠어. 그 아버지도 금연·금주 중이었던 게 분명해.”

예전에 소설가 김훈씨가 그랬다.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고. 그때 그의 나이가 50대 중반이거나 후반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알기로 더 피우면 죽을 거라는 의사의 경고에 담배는 끊었지만 술은 못 끊었던 걸로 안다.

모르겠다. 술과 담배 없이 겨우 두 주를 버틴 몸으로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여자 나이 마흔 셋. 좀 이르긴 하지만 시대의 불우와 함께 폐경과 갱년기 우울증을 걱정하고 있는 나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뛴다. 지난 20년간 담배와 술이 갉아먹은 그 많은 시간과 돈을 앞으로 어디에 쓸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금연과 금주 1주년 기념으로 일단 여행부터 가자. 페루 어때? 우리 두 사람 몫의 술과 담배에 부과된 세금만 저축해도 여행 경비는 빠지고도 남을 거다, 아마….”

“나 피아노 배우고 싶어. 1년 뒤면 중고 피아노 한 대 정도는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너 연극도 하고 싶다며? 아예 극단을 하나 만들까? 시골 동네 소극장 스타일로.”

“오, 끝내준다. 멋져.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치게.”

중독이 무서운 건 우리를 노예를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리고 우리가 술과 담배의 노예 되기를 지금 이 순간 거부할 수 있는 건 ‘사랑과 희망의 노예’ 되기를 거부하지 않는 중독자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달콤한 중독자들. 행운아인 셈이다.

칼럼니스트 겸 작가 (@kimkyung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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