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미 영화평론가

<미생>은 케이블채널 tvN에서 올해 10월17일부터 방송된 20부작 드라마다. 케이블TV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것은 물론 공중파까지 포함한 TV 프로그램 중 기사의 양이나 검색 순위 등을 반영한 콘텐츠파워지수(CPI)에서 1위를 차지했다. 종영 후에도 많은 관련기사를 쏟아 내며, 주인공의 이름을 딴 ‘장그래법’이 운운될 만큼 사회적인 신드롬을 낳고 있다.

<미생>은 프로 바둑기사로 키워졌으나 실패하고, 고졸 검정고시 학력으로 대기업 무역상사에 ‘낙하산’으로 인턴사원이 된 장그래(임시완)를 중심으로 한 치열한 회사 생활을 담는다. 조직생활 경험이 전혀 없는 장그래는 회사에서 완전히 외톨이가 된다. 장그래는 자신이 프로 기사가 되지 못한 것을 ‘부족한 노력 탓’으로 규정하고, 적응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한다. 그는 바둑에서 익힌 전략을 활용해 인턴들 사이의 경쟁을 뚫고 계약직 사원이 된다.

<미생>은 <이끼> 등 조직의 생리를 무서우리만치 묘파해 내는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바탕으로, 입체감 있는 각색에 성공한 드라마다. 각본·연기·연출은 물론이고, 세트·촬영·편집까지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를 보인다. <막돼먹은 영애씨> <직장의 신> 등 그동안 회사생활을 보여 주는 직장드라마는 많았지만 <미생>처럼 치밀하고 정교하게 회사생활을 보여 준 드라마는 없었다. 절묘한 캐스팅에 힘입은 생생한 캐릭터뿐 아니라 업무의 진행방식이나 부서 간 알력을 묘사하는 수준은 가히 극사실적이다. <미생>은 마치 실제 세계를 보는 듯한 현실적 질감을 지닌 직장드라마인 동시에, 현실의 논리를 뛰어넘는 윤리를 담는다.

어떻게 버틸 것인가

<미생>은 가장 평범해 보이는 회사원의 일상이 숨 막히는 전투의 연속임을 드러낸다. 드라마는 회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서 갈등이나 성차별·내부고발 문제 등을 깊숙이 짚으며,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바둑에 빗대어 말해 준다. 드라마는 협력업체와의 상생이나 성접대에 반대하는 신념 등 구체적인 직장윤리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방점이 찍히는 것은 정글 같은 세계에 내던져진 사회 초년생들이 어떻게 사회에 적응하고 편입해 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지점에 있다.

드라마는 장그래를 비롯한 신입사원들의 고군분투와 그들의 성장기를 보여 준다. 장그래는 피 튀기는 경쟁을 통해 겨우 계약직원이 되고, 비상한 실적을 내기도 했지만 계약 연장조차 불투명하다. 정규직인 입사동기들도 천적 같은 상사들 때문에 괴롭다. 가장 스펙이 뛰어난 장백기는 기본기를 강조하는 완벽주의자 강 대리를 만나 사무보조 역할만 한다. 능란한 사교성을 자랑하던 한석율은 후배를 등치는 성 대리를 만나 “소시오패스” 소리를 듣는다. 탁월한 실무능력을 지닌 안영이는 최악의 남성 중심 조직에서 무수리 취급을 받는다.

이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각자 길을 찾는다. 드라마가 이들을 통해 제시하는 해법은 ‘자신이 잘났다는 생각을 버리고, 일단 굽히고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착실히 기본기를 쌓은 뒤 필요할 때 능력을 보여 주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존버(존나게 버티기) 정신’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미생>은 뻔하고 보수적인 처세술을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들과 다름없는 텍스트일까. 그렇지 않다.

자기계발서를 뛰어넘는 윤리

장그래의 아이디어가 성과를 내고, 차츰 회사에서 인정받는 성공스토리를 이어 가던 드라마는 돌연 그가 계약직임을 환기시킨다. “이렇게만 하면 정직원이 되는 것인지”를 묻는 장그래에게 그의 상사 오상식은 어려울 거라 답한다. 오상식은 몇 년 전 계약직 여사원에게 희망을 말했던 자신을 책망한다. 그 직원은 부당하게 퇴사당한 뒤 죽었다. 사람을 계약직으로 고용해 쉽게 써먹고 버리는 시스템이 고쳐지지 않는 한 노력하며 버틴다는 개인적인 해결책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를 짚어 준다. 오상식은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대책 없는 희망이나 무책임한 위로”가 무슨 소용인지 묻는다. 오상식의 동기인 선 차장은 “그런 말이 절실한 사람도 있다”고 받아친다. 이 장면은 <미생>이 자기계발서이자, 자기계발서가 아님을 내비친다. 즉 <미생>이 정글 같은 현실을 보여 주며, 그 현실을 묘파해 가는 인물들을 통해 위로를 건네는 텍스트인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을 지닌다는 것을 고백한다.

<미생>은 경쟁과 착취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정밀하게 그리면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유지한 채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처연하게 담는다. 자기계발서의 가르침을 자기계발서보다 더 통렬하게 전해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계발서가 담지 못하는 시스템의 모순과 인간다움에 대한 갈망을 놓치지 않는다.

바뀌어야 할 것은 개인이 아닌 시스템

장그래는 “정규직이냐 계약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계속 함께 일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그토록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그래 봤자 바둑, 그래 봤자 일일 뿐”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 일”이라는 작은 성취감을 위해서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의 일원이 돼 ‘사람 구실’을 하며 사는 것, 다시 말해 소속감과 성취감을 얻기 위함이다. 문제는 그저 소속감과 성취감을 얻고 싶은 사람들에게 ‘월급이랑 승진밖에 중요한 것이 없는 일벌레’로 살아가든지, 그것이 안 되면 소속도 없고 쓸모도 없는 ‘잉여’의 삶을 살아가든지 양자택일하라는 사회다. 장그래의 그래(YES)는 ‘긍정의 정신’을 뜻한다. 그 자체는 생의 윤리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이 지닌 ‘긍정의 정신’을 빨아먹고 버리는 경쟁과 착취의 시스템에 의해 긍정의 정신은 결국 자본을 살찌우는 자기계발서의 논리가 된다. 중요한 것은 개인들이 품은 긍정의 정신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긍정의 에너지를 발휘하면서 소속감과 성취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와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장그래는 특별한 노력에도 계약 연장이 되지 않았다. 냉혹한 회사 생활에서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고자 했던 오상식과 김대리도 결국 퇴사했다. 그들은 작은 회사를 꾸려 자신들의 꿈과 열정을 불태운다. 대기업의 갑질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그들 회사의 앞길이 어떠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의 공동체가 ‘완생’으로 나아가길 바랄 뿐이다.

영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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