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역사연구가

한국 현대사에서 사람들에게 그다지 잘 기억되지는 않지만 의외로 중요한 선거가 하나 있었다. 1950년 5월30일 치러진 2대 국회의원 선거가 바로 그것이다.

5·30 선거 결과는 여야 우익진영 모두를 합쳐도 전체 의석의 38%인 81석에 그쳤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은 대한국민당 24석, 국민회 14석을 포함해 최대한 모은다 해도 57석을 넘지 않았다. 그에 반해 무소속은 전체 의석의 60%에 해당하는 126석에 이르렀다.

무소속 성향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하지만 진보·중도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고 하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개별적 사례를 보더라도 중도·진보 성향의 후보들이 압승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대통령은 임기가 2년이었고,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였다. 이런 조건에서 5·30 선거에 이어질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다시 선출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 다음은 장면이 분명했다. 중도·진보 성향의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을 낙마시키고 새롭게 정부를 구성한 다음 북한과 평화통일 협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쉽지는 않았겠지만 역사의 향방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남조선노동당은 이와는 전혀 다른 엇박자를 보였다. 남로당의 5·30 선거 방침은 "망국적인 5·30 단독선거를 파탄시켜라"였다. 하지만 민중은 남로당 방침을 전혀 수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중도·진보 성향의 후보에 표를 던졌다. 그것만이 당시 정세를 돌파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었다.

도리 없이 남로당은 고립됐다. 그러한 상황에서 남로당이 의지한 것은 북한 인민군의 남하였다. 결국 5·30 선거 직후인 6월25일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로 한국전쟁이 발생했고 모든 것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남로당은 이남 땅에서 완전히 뿌리가 뽑힌 채 흔적을 잃고 말았다.

한국 현대사를 되돌아보면 대중이 역사의 향방을 좌우하며 결국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장면이 수없이 많다.

한국 민주화의 분수령이 된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의 백미를 이룬 것은 시민군의 등장이었다. 5월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에 뒤이은 시민군의 등장은 그 누가 사전에 기획한 것도 아니고 집단토론을 통해 결정된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대중의 본능적이면서도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1987년 6월 민중항쟁 역시 투쟁의 구심이었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사전에 계획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어 전개된 것이다. 이어 터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더욱 극적이다.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 대중은 짧은 기간 안에 1천개가 넘는 민주노조를 만들었다. 불과 1년 전 유력한 노동운동가들이 정권 탄압의 후유증을 겪어 한국에서는 상당 기간 동안 민주노조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비관적 분석이 적지 않았는데, 이를 일거에 뒤집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중 주체의 원리를 간파할 수 있다. 대중의 선택을 받드는 자들은 승리를 구가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대중 주체의 원리는 변함없이 관통하고 있다. 그대, 대중을 하늘로 받드시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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