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펠릭스 누스바움, <죽음의 승리>, 1944년, 독일 오스나브뤼크 펠릭스 누스바움 하우스 소장.
   
이유리
<검은 미술관> 저자

방금 폭격이라도 일어났던 것일까.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벽은 무너져 있고, 잎사귀가 하나도 없는 나무는 앙상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있다. 그림 앞쪽에는 인간 문명의 잔해들이 마치 거대한 쓰레기처럼 뒤덮여 있다. 부서진 전화기와 타자기·전구 같은 인류문명의 도구들. 그리고 나침반과 악보와 팔레트 같은 인간지성을 상징하는 것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다. 이 황량한 폐허를 딛고 서 있는 자들은 다름 아닌 해골들이다. 그들은 드럼과 나팔부터 바이올린과 심벌즈까지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하고 있다. 이 ‘죽음’이 연주하는 기괴한 음악소리에 맞춰서 인간들은 그림 오른쪽에 보이는 지옥 입구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도상적 전통에 따르면 지옥은 ‘신의 정의가 이 땅에 이뤄지는’ 최후의 심판 때 등장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림의 왼쪽 구석을 보면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이 무참히 깨져 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할, 엄정한 정의의 기준을 상징하는 ‘저울’은 그녀의 머리 위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다.

그렇게 이 그림에는 희망이라곤 전혀 없어 보인다. 그림 속에서 유일하게 표정이 있는 것들은, 하늘에 떠 있는 연들이다. 그러나 이 연들의 표정 속에도 ‘행복’과 ‘웃음’은 없다. 정말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처절할 정도로 좌절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화면 오른쪽에 보이는 부서진 고전적인 기둥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도상학에서 ‘문명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인류문화가 몰락하고 있다고 봤을까. 기둥 옆에 나뒹굴고 있는 ‘찢어진 신문 스크랩’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충격적인 정치적 뉴스’를 뜻한다.

그림의 오른쪽 구석을 보면 펼쳐진 달력이 보인다. 자세히 보면 1944년 4월18일이라고 적혀 있다. 이때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나치 독일이 최후의 발악을 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바로 나치의 박해를 받았던 유태인이었다. 벨기에의 작은 다락방에 몸을 숨긴 채 죽음에 대한 예감으로 하루하루 불안감에 짓눌리며 숨죽여 지내야 했던 독일 출신 유태인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Felix Nussbaum). 그는 온통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이 그림을 마지막으로 완성시킨 지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때 그렇게 두려워했던 일에 직면한다.

1944년 7월20일 새벽 나치 친위대가 그의 다락방에 갑자기 들이닥쳤다. 연합군이 브뤼셀을 해방하기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이를 지켜봤던 목격자의 회상이 남아 있다.

“어느 날 새벽 1시쯤 됐을 때 우리 집 근처의 거리가 모두 봉쇄됐지요. 거리와 지붕 위는 독일군 병사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요. 서치라이트의 불빛이 우리 집 건물 위로 쏟아졌고 병사들이 다락방으로 몰려갔지요. 우리는 위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를 들었습니다.”

누스바움은 역시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화가였던 부인 펠카 플라테크와 함께 메헬렌이라는 도시에 있는 중계수용소로 바로 이송됐고, 같은해 7월31일 독일령 폴란드 아우슈비츠행 열차에 짐짝처럼 실렸다. 하필 그 열차는 아우슈비츠로 향했던 마지막 열차였다. 563명이 같은 열차로 이송됐고, 8월2일 이윽고 ‘지옥의 이름’과 다름없었던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그중 207명이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독가스로 살육 당했다고 전해진다. 누스바움도 그 207명 중 한 명이었다. 1944년 8월9일이었다.

펠릭스 누스바움은 1904년 12월11일 독일 오스나브뤼크에서 유복한 유태인 철물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필립 누스바움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기병대에 입대해 독일을 위해 싸운 경력이 있는 ‘애국자’였다. ‘유태인은 국적도 국경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에 저항하기 위해 누스바움의 아버지는 나치의 발흥 이전에 오히려 국가에 과잉 충성했던 것이다. 이렇게 독일에 동화된 개종 유태인이었던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펠릭스 누스바움도 자연스럽게 그냥 미술을 사랑하는 독일인으로 키워졌다. 이후 누스바움은 함부르크에서 미술의 기초를 배운 후 1923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30년대 초반에는 이미 베를린에 거주하는 젊은 예술가 세대의 중요한 인물이 됐다. 1932년에는 이탈리아 로마의 ‘독일 아카데미’의 장학금을 받고 초청될 정도로 전도유망한 젊은 화가였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나치가 정권을 탈취하고 반유대주의 정책을 펴면서 그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그는 이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시대가 그의 ‘유태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일깨워 준 셈이었다.

결국 누스바움은 1934년 스위스로 이주했다가 파리를 거쳐 이듬해 여행비자로 벨기에에 정착한다. 외국인 등록수속을 밟고 반년마다 체재 허가를 연장하는 불안한 망명생활의 시작이었다. 1940년 5월10일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누스바움은 더 꽁꽁 숨어야 했다. 결국 누스바움 부부는 레지스탕스 일원이었던 집주인이 준비해 준 다락방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집주인에게 제공된 위조 배급카드를 써서 숨죽인 채 살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누스바움은 상당한 양의 회화를 남겼다. 자신의 그림을 보기 위해 뒤로 물러나 서 있을 수도 없는 작은 방에서 거의 정신착란 상태로 작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누스바움은 “내 그림을 발견하면 병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낸 메시지라고 생각하라”며 그토록 비좁은 공간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일기를 남겼다. 뒤로 물러날 공간이 없어 눈앞에 바짝 대고 그릴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처지에서 그는 왜 굳이 그림을 그렸을까. 차라리 나치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면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는 게 더 나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힘을 제공받았다. 그에게 그림은 ‘내가 살아 있는 증거’이자 ‘저항의 행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펠리스 누스바움과 펠카 플라테크는 각각 수송번호 XXVI/284·XXVI/285라는 번호를 부여받고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펠릭스의 아버지·어머니·형도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누스바움의 가족은 이렇게 통째로 사라졌다. 이런 결과를 예감하고 있었던 건지 누스바움은 1942년 5월과 6월에 자신의 모든 작품을 치과의사인 그로스필스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러곤 부탁했다.

“내가 없어지더라도 내 그림은 죽이지 말아 주게.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게나.”

그 간절한 희망대로 그의 작품은 오랜 잊힘에서 벗어나 1970년 펠릭스 누스바움의 사촌인 구스텔 모제스 누스바움의 노력으로 다시 세상에 나왔다. 그녀는 그로스필스에게 맡겨 둔 펠릭스 누스바움의 그림이 벨기에의 한 지하실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그림을 다시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녀와 누스바움을 기리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1998년 7월16일 누스바움이 태어난 도시 오스나브뤼크에 그의 그림 160여점을 소장한 펠릭스 누스바움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펠릭스 누스바움은 그렇게, 일찍이 그들 가족을 쫓아낸 고향 오스나브뤼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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