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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47] 민중의 지팡이냐, 민중을 때려잡는 몽둥이냐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노동조합은 양승조 석방투쟁과 관련해 다른 대책을 다시 세웠다. 지금까지는 조합원들이 즉자적으로 모여 집회를 했는데 앞으로는 좀 더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을 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면회라는 합법적인 통로를 이용해 조합원들이 당국에 집단적으로 항의하고 노조의 투쟁의지를 과시하기로 했다. 예컨대 점심시간이나 퇴근시간 이후를 이용해 조합원들과 함께 경찰서로 집단면회를 가는 식이다.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양승조 석방투쟁

1976년 9월17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조합원 100여명을 동원해 동부경찰서로 면회를 갔다. 대낮에 100여명이 갑자기 나타나 면회하러 왔다고 하자 경찰은 어쩔 줄을 몰라 무조건 가로막았다. 조합원들은 경찰서 정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우리가 면회하러 왔지 데모하러 왔나? 왜 남들 다 시켜 주는 면회가 안 된다는 거야!"

조합원들이 거칠게 항의하자 기동경찰은 더욱 강압적으로 나왔다.

"야! 이 개 같은 년들아 빨리 꺼지지 못해? 이 씨팔년들이 겁도 없이 어디 와서 지랄이야!"

기동경찰조차 공돌이 공순이라고 해서 완전히 얕잡아 보고 마구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기죽고 물러설 사람들이 아니었다.

"야, 이 개새끼야! 못 꺼지겠다 씨팔 새끼야! 왜 죄 없는 사람 잡아다 가둬 놓고 면회도 안 시켜 주냐. 개새끼야! 이게 민주주의냐?"

"이 빨갱이 같은 년들이 죽고 싶어 환장했나! 집에나 가, 이년들아!"

조합원들은 경찰의 무식한 욕설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양승조 부장을 석방하라!"

경찰서 안팎에서 사람들이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을 쳐다봤다. 길 가던 시민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이 광경을 빙 둘러싸고 구경했다. 경찰에서는 신경이 쓰였는지 경비과장이 나왔다.

"조용히 해요, 여러분! 즉시 해산하지 않으면 전원 연행해서 즉결에 보내겠어요. 즉시 해산하시오!"

경비과장의 말에 조합원들은 벌떼같이 일어섰다.

"좋아요. 우리도 양 부장하고 같이 살 테니까 즉결을 살리든지 징역을 살리든지 맘대로 하시오."

이소선의 심정도 그랬다. 지금까지 노동조합 일을 해 왔지만 구속돼 본 적은 없었다. 징역 간다는 것은 일정 때는 콩밥 먹으러 간다고 했다. 도둑놈들이나 가는 것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고 학생들이나 재야인사들이 바른말 하면 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역살이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그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춥고 배고파 고생할 양승조를 생각하니 같이 들어가서 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합원들의 항의에 당황한 경비과장은 주춤하더니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전원 파출소로 연행해!"

굶주린 이리떼처럼 기동대들이 달려들어 저항하는 조합원들을 경찰서 옆에 있는 선양파출소에 잡아넣었다. 파출소 안에서도 조합원들은 구호를 외치면서 경찰의 폭력적인 연행에 항의했다. 파출소 벽에는 '고운 말을 쓰자'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어떤 여성조합원 하나가 그 표어에 침을 뱉었다.

"말은 좋다, 고운 말을 쓰자? 그래 놓고 우리한테 개 같은 년, 빨갱이 년이라고 욕해? 경찰한테는 그런 말이 고운 말인가 보지?"

조합원들 모두가 파출소가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웃었다.

조합원들이 계속해서 구호를 외치고 떠드니까 파출소 소장이 10명만 대표로 면회시켜 줄 테니 조용히 있으라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조합원 중에 10명을 뽑아 양승조를 면회하기로 했다. 이소선은 다른 조합원한테 기회를 주기 위해 대표에서 빠졌다.

10명의 대표가 면회를 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이들이 울면서 돌아왔다.

"양 부장님이 얼마나 놈들한테 두들겨 맞았는지 말을 잘 못해요. 입술만 겨우 움직이더니 창살을 붙든 채 우리를 바라보기만 하더군요. 정말 나쁜 놈들이에요. 어쩌면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 수가 있어요?"

양 부장을 면회한 조합원들은 창살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면서 눈물만 흘리다가 쫓겨났다.

여성조합원 무시하고 욕하는 경찰

이날 면회는 이 정도로 끝냈다. 이소선은 동부경찰서에서 돌아와 노조사무실에서 잠깐 쉰 다음 평화시장으로 내려갔다.

"이 여사님, 안녕하십니까. 실례지만 잠시 얘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

중앙정보부에서 가끔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간이 없다는 이소선을 억지로 끌다시피 했다. 마지못해 근처 다방으로 갔다.

"이 여사, 노동교실에 붙어 있던 육영수 여사 사진을 누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사람이 말한 육영수 사진은 1974년 8월15일 육영수가 피살당하고 난 뒤 기관에서 노동교실에 게시하라는 압력을 가해 걸었다. 그런데 지난번 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해 육영수 사진을 떼어 내고 그 자리에 전태일 사진을 걸었다. 떼어 낸 육영수 사진은 이소선이 아무도 몰래 싸서 창고에 처박아 뒀다.

"나는 그 사진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소!"

"그러면 어떻게 해서 육 여사의 사진이 걸려 있던 자리에 다른 사진이 걸리게 된 것입니까?"

"그거야 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들이 결의해서 걸었기 때문에 그 사진을 어느 누구도 건드릴 권한이 없소."

이소선은 단호하게 말했다. 정보원은 뭔가를 한참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지부장한테 육영수 사진의 행방을 밝힐 것과 전태일 사진을 뗄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지부장은 지부장의 권한으로서도 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한 사항을 독단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항이라며 계속 버텼다.

이날 저녁 8시30분에도 조합원 70여명이 모여 동부경찰서 정문으로 가서 면회를 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경찰은 방망이로 때리면서 심지어는 총부리로 여성조합원들의 가슴을 찌르면서 밀어내기까지 했다.

다음날 오후 1시 또다시 조합원 150여명이 모여 경찰서 정문 앞에서 면회를 요구하면서 농성을 벌이다 돌아왔다. 그리고는 같은 날 밤 8시30분에 조합원들을 더 많이 동원해서 갔다.

저녁 8시부터 조합원들이 노동교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는 대로 조를 짜서 미리미리 보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경찰서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가 밤 9시 정각에 경찰서 정문 앞에서 집결해 면회투쟁을 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이윽고 밤 9시 정각이 됐다. 경찰서 근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조합원들이 일제히 경찰서 정문 앞으로 집결했다. 300명이 넘는 숫자였다. 조합원들이 집결하기 전에 기동대가 먼저 경찰서 정문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경찰은 몇 시쯤 몰려올 것인가를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알아차리고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구속자를 석방하라!"

"면회를 허용하라!"

조합원들은 기동경찰과 대치하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지치지도 않고 끈덕지게 서서 구호를 외치고 박수를 쳤다. 시간이 꽤 흘렀다. 경찰에서 면회를 시켜 주겠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이소선과 남자 조합원들에게 차례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경찰들이 또다시 교활한 술책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소선과 완력이 있는 남자 조합원들을 끌어들여 여성 조합원들과 분리시키겠다는 술책이었다. 속지 않았다.

강제로 연행되는 조합원들

기동대는 남자 조합원 한 사람을 솔개가 병아리 채 가듯 덥석 잡아끌고 가려고 했다. 여성 조합원들이 한꺼번에 함성을 지르면서 남자 조합원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잡아 끌어당겼다. 남자 조합원은 경찰한테 잡히지 않았다. 그 순간 경찰이 이소선의 팔목을 붙잡았다. 5명의 경찰이 이소선의 사지를 붙들고 잡아당겼다. 이소선은 경찰들에게 잡혀가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 조합원들이 경찰들과 엉겨 붙어 이소선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앞에서는 경찰이, 뒤에서는 조합원들이 잡아당기니 몸뚱아리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소선은 소리도 지를 수가 없었다. 팔목이며 허리·어깨가 떨어져 나가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거의 10여분간이나 이소선의 몸이 오징어처럼 찢어질 듯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기진맥진해져서 축 늘어져 버렸다. 이소선이 눈을 감은 채 정신을 못 차리니까, 할 수 없이 그의 몸을 잡고 있던 조합원들이 손을 풀고 말았다. 조합원들은 이소선이 끌려가는 데로 몰려들어 오더니 그만 경찰서 마당에까지 들어와 버렸다. 경찰서 마당에서 조합원들과 경찰이 난데없는 육박전을 벌였다. 이 싸움 과정에서 경찰들은 여성 조합원들의 젖가슴을 주무르기까지 했다. 이소선은 경찰들의 행동이 짐승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연약한 여자들을 발로 차고 곤봉으로 때리면서 조합원 한 사람당 4명의 경찰이 달라붙어 경찰서 안으로 내던졌다.

결국 여성 조합원 47명과 이소선은 경찰서 2층 강당으로 끌려가고 남자 조합원 10명은 1층 수사계로 끌려가고 말았다.

강당으로 연행된 조합원들에게 경찰이 집주소와 직장 등을 대라고 요구하자 어떤 조합원들은 엉터리 주소와 이름을 말해 주기도 했다. 이 작업이 형식적으로 끝나자 경찰 간부 하나가 강당 단상에 올라 교육을 시키려고 했다.

축 늘어져 있던 이소선은 물을 마시고 누워서 숨을 고랐다. 그런데 또 교육을 시킨다고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려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경찰은 우리를 교육시킬 자격이 없다. 우리한테 개 같은 년, 빨갱이 같은 년 등 욕설을 마구 하고, 노동자들을 무조건 개 패듯이 패고 여성 조합원의 젖가슴을 더듬는 행동을 했다. 경찰이 무슨 자격으로 교육을 한단 말이야!"

이소선의 말에 조합원들은 함성을 질렀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냐? 민중을 때려잡는 몽둥이냐? 폭력경찰 물러가라!"

조합원들이 항의하는 소리에 경찰들은 조용히 하라며 소리를 꽥꽥 질렀다. 조합원들이 기죽지 않고 계속 항의하자 경찰들은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신 전투복을 입은 경찰들이 문밖에서 지켰다. 강당 안은 완전히 조합원들 세상이었다. 이에 조합원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웃고 떠들며 단상에 올라 연설 흉내를 내기도 하고 강당 안에 있는 기물들을 이것저것 만져 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맞고 고문당하고, 외신기자를 찾다

밤 12시가 되자 경찰은 조합원들을 귀가시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통행금지 때문에 집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으니까 노동교실까지 실어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노동교실을 향해 조합원들을 실은 경찰차가 출발했다. 노동교실에 거의 도착하자 갑자기 방향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노동교실에서 150여명의 조합원들이 농성을 하고 있으니 그들과 합류하면 안 된다면서 중부경찰서 강당으로 간 것이다. 조합원들은 중부경찰서 강당에서 직원들이 깔고 덮는 이부자리로 잠을 자고 아침 6시께 석방됐다.

한편 수사과로 끌려갔던 10명의 남자 조합원들은 한 명씩 분리돼 보복 폭행을 당했다. 경찰은 누가 먼저 가자고 했는지, 주동자는 누구인지를 밝히라면서 이들을 밤새도록 두들겨 팼다.

“이 새끼들, 이북에서는 김일성한테 어버이라고 하는데 네놈들이 이소선이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빨갱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냐?”

경찰은 누구한테 빨갱이 세뇌교육을 받았는지 밝히라면서 고문을 가했다. 남자 조합원들은 동부경찰서에서 이렇게 조사를 받고 다음날 오전 9시께 다시 중부경찰서로 이송됐다. 남자 조합원들이 중부서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소선은 지부장과 곧바로 정보과로 가서 항의했다.

"경찰서에 면회하러 간 것도 죄가 되느냐. 왜 시켜 달라는 면회는 안 시켜 주고 사람들을 연행해 가고, 두들겨 패고, 아직까지 붙잡고 있느냐?"

이소선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경찰은 즉시 재조사를 하던 것을 멈추고 남자 조합원 전원을 석방시켰다.

조합원들이 면회투쟁을 연이어 계속하자 경찰들은 이제 조합원들의 집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위협을 가했다. 조합원 윤미숙·오홍순·이광숙 등의 집 안방까지 형사들이 넘나들었다.

"청계피복 노동교실은 빨갱이 세뇌교육을 시키는 곳이니 그런 곳에 당신 딸을 보내지 마시오. 공연히 신세 망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못 가게 하시오."

이영순의 집에는 형사들이 찾아와 부모님들을 위협했다.

"당신 딸 노동교실 같은 데 한 번만 더 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겠소."

뿐만 아니라 시골에 집이 있는 조합원들 경우에도 이와 같은 위협을 가하는가 하면, 공연히 신원조회를 하겠다며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부모님들은 놀라서 자신들의 딸이 어디 가서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 싶어 야단을 치기도 하고, 어떤 부모는 이소선한테 찾아와 왜 우리 딸을 나쁜 길로 들게 했냐고 항의했다.

노동자들이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처절하게 당해도 고통의 현장에 기자는 없었다. 신문사에 찾아가 아무리 호소를 하고 애원을 해도 기자들은 외면했다. 그러니 노동자들의 문제가 단 한 줄도 신문에 날 리가 없었다. 노동자들은 언론에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소선과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은 투쟁이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찾던 중 외신기자를 부르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외신기자 중에서 한국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취재하는 기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투쟁하는 현장에 와서 취재해 가면 이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조합원들이 면회투쟁을 끈질기게 할 때 AP통신 기자가 계속해서 취재해 갔다. 경찰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외신기자가 또 하나의 압력수단이 된 셈이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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