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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45] 연대투쟁의 폭을 넓히다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 1978년 2월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측의 사주를 받은 남성노동자들이 여성노동자들한테 똥물을 뿌렸다.

비슷한 무렵 1970년대의 처절하고 끈질긴 여성노동자 투쟁의 대명사인 인천 동일방직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동일방직노조는 72년 5월 회사측의 지원을 받은 남자 후보들을 큰 표차로 물리치고 주길자가 지부장에 선출되면서 민주적인 노조로 발전했다. 동일방직노조는 72년 5월 말 현재 1천383명의 조합원 중 1천214명이 여성이었다. 조합원 대다수가 여성인 노조에서 여성 위원장이 출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나체시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지부장인 주길자 지부장에 이어 75년 이영숙 집행부가 들어섰다. 이 지부장을 중심으로 노조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회사측에서는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회사측은 76년 2월 대의원선거를 앞두고 조합원들을 압박했다. 그러나 회사측에서 내세운 대의원 숫자는 집행부를 붕괴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이에 회사측은 자신들이 내세운 지부장 후보 고두영을 당선시키기 위해 대의원들을 회유·징계·협박·공갈 등으로 탄압했다.

노조가 대의원대회를 개최하려고 하면 대의원들을 감금·납치해 대회를 무산시키는 수법을 썼다. 그러던 중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이 이영숙 지부장을 불법으로 연행한 상태에서 이미 노조에서 징계를 당한 고두영이 관의 비호 아래 7월23일 기숙사 강당 문을 걸어 잠그고 자파 대의원 24명만으로 대의원대회를 열었다. 고두영은 대의원대회에서 이 지부장을 불신임하고 자신을 지부장으로 선출하게 했다. 정족수에 미달할 뿐만 아니라 대의원대회 소집 절차도 어긴 불법적인 대회였다.

조합원들은 회사측의 사주에 의한 대의원대회가 불법이고 무효임을 폭로하기 위해 회사측이 사전에 기숙사 문을 못질해 놓은 것을 박차고 들어가 농성에 돌입했다. 처음 200여명의 조합원들이 기숙사 창문에서 뛰어내려 시작한 농성이 오후 2시가 되면서 출근자들이 합세할 움직임을 보이자 경찰은 연행해 간 이영숙 지부장을 일단 석방했다.

그런데 출근자들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고 판단한 경찰은 다시 이 지부장과 이총각 총무부장을 연행해 갔다. 조합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밤 10시 출·퇴근자들이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튿날인 7월24일 농성조합원은 800여명으로 불어났다. 농성장 밖에서는 300여명이 호응했다. 전면적인 파업농성을 하면서 노동자들은 "이영숙 지부장을 석방하라" "회사는 자율적인 노조활동에 개입하지 말라" "7·23 대회는 무효다" "엉터리 고두영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다음날까지 계속된 농성으로 노동자들은 한낮의 더위와 배고픔에 지쳐 있었다. 이때 갑자기 경찰·회사 경비원, 남자 사원들이 합세해 머리채를 끌고 발길질을 하면서 조합원들을 경찰차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벗고 있는 여자 몸엔 경찰 아니라 그 누구도 남자들은 손을 못 댄대. 우리 모두 옷을 홀랑 벗어 버리자."

노동자들이 흩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말에 탈진해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옷을 벗어던졌다. 이른바 나체시위였다.

이 얼마나 처절한 투쟁인가! 젊은 처녀들이 자신의 조직과 권익을 지키기 위해 수치심도 내버리고 짐승 같은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은 채 저항을 해야 하는 참혹한 현실이었다.

경찰과 회사 사원들은 나체시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개 패듯 해서 72명을 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3명의 노동자는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했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소식을 접하면서 이소선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동안 동일방직 문제를 둘러싸고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에서도 관계자 대책회의가 여러 번 있어서 사건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잔인무도할 수 있는가!

이소선은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한 조합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누워 있는 이돈희·이순옥은 초점을 잃은 눈을 멀거니 뜬 채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입가에는 거품만 내뿜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본 이소선은 기가 차서 뭐라고 말문이 막혔다. 수건에다 물을 적셔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 줬다. 옆에 회사 사람이나 노동청 직원이 있으면 멱살을 잡고 어떻게 할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동일방직노조에 탄압은 이후에도 계속돼 정부·회사·섬유노조가 야합해서 노동조합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78년 2월에는 회사측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동일방직노조가 대의원 선출 투표를 감행하려 하자 회사측 남성노동자들이 똥을 날라다가 여성조합원에게 퍼부었던 것이다. 이때 경찰들은 구경만 했고,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노조원들에게는 냉소와 욕설을 퍼부었다. 이 사건이 소위 '동일방직 똥물세례 사건'이다. 회사측은 노동자 126명을 해고했고 해고자 명단을 각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을 봉쇄했다.

이 과정에서 재야 민주세력과 민주노조가 투쟁에 동참했다. 76년 당시는 청계피복노조가 자체 투쟁에서 이기는 싸움을 몇 번 겪은 뒤라서 노동조합의 힘이 여느 때에 비해 강한 터라 동일방직노조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동일방직 사건을 주제로 하는 기도회·집회 등에 조합원들이 집단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노동자는 지역과 업종을 초월해 하나라는 의식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풍천화섬 사건

당시만 해도 기업별노조라는 틀에 갇히기를 바라는 자본가들의 논리에 노조 지도자들도 순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잘못된 기업별노조 의식을 의도적으로 깨뜨려야만 했다. 일차적으로 동일한 업종의 노동자들이 공통된 내용을 가지고 공동으로 투쟁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했다. 그리하여 청계피복노조는 같은 봉제업체의 노조결성 문제를 비롯해 근로조건 개선 문제, 임금인상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성수동에 소재한 남진산업의 임금인상 투쟁, 월곡동에 소재한 극동피혁 파업농성과 노조결성 투쟁, 그리고 동대문 종합시장의 유진산업 집단해고 사건에서 해고수당 3개월분과 퇴직금 지급 등을 따낸 투쟁, 신당동 소재 신일산업사의 폐업 철회 투쟁 등 크고 작은 문제에 청계노조는 적극적으로 관여해서 함께 싸웠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투쟁이 풍천화섬 노동자들의 노조결성을 위한 투쟁이다.

풍천화섬은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소재한 에이원저지라는 옷감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생산직 노동자들이 대부분 연소 여성노동자로서 800여명 규모에 달하는 비교적 큰 사업체였다.

당시 에이원저지는 수출은 물론 국내수요도 많아 실적이 좋은 회사인데도 근로조건은 형편없었다. 공휴일·생리휴가 등을 무시하면서 하루 3교대 작업을 2교대로 바꾸고, 임금도 2~3년 근무한 사람이 일당 480원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우선 노동조합을 결성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들은 청계피복노조에서 운영하는 노동교실에 가면 노조를 결성하는 방법을 잘 가르쳐 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노동교실로 찾아왔다.

머리가 유난히 긴 십대 후반의 박숙녀라는 처녀가 동료 4명을 인솔해서 노동교실에 찾아왔다. 노동교실 실장인 이소선 등은 이들이 말하는 회사 사정을 자세히 듣고, 노조를 결성하고자 하는 각오를 확인했다. 그래서 청계피복노조 간부와 당시 노동교실을 드나들던 노동운동가들을 통해 이들을 집중적으로 교육시켰다.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애초에 동료들을 인솔해서 노동교실에 찾아왔던 박숙녀였다. 그녀는 나이는 어렸지만 야무지고 대담성이 있었으며 동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이소선 등은 박숙녀에게 또 다른 그룹을 만들어서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박숙녀는 5명 단위로 4개 그룹을 조직해 노조결성 교육을 받게 했다.

이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노조결성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농성투쟁을 하면서 투쟁 현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추석날인 9월9일에도 휴가를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것에 항의농성을 하면서 이 자리에서 노동조합 결성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9월9일 박숙녀는 당일 아침 기숙사 베란다에 500여명의 동료들을 모이게 한 후 ‘단결의 노래’를 부르며 임금인상과 기숙사 외출 자유 보장, 공휴일 근무제 폐지, 부서이동 복귀, 노조결성 등 7개 사항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구호를 외쳤다.

기숙사 베란다에서 한참 노래와 구호를 외치면서 농성을 하다가 이들은 운동장을 돌며 시위를 했다. 이때 중앙일보사의 취재차가 회사 안으로 들어와 취재를 하자 그동안 무관심과 멸시·천대 속에 살아온 노동자들이 추석날조차 고향은커녕 작업을 해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극도로 흥분했다. 120여명이 취재를 마치고 회사 정문으로 나가는 취재차를 따라 가두시위를 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적혀 있는 휘장을 두르고 3킬로미터 가량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시위를 하던 노동자들은 뒤늦게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한양대 부근에서 머리채를 잡히고, 군홧발로 걷어차이는 폭행을 당했다. 76명이 동부경찰서에 연행됐고 2명이 동부시립병원에 입원했다.

노동자들의 가두시위는 유신 이후 버스안내양들의 집단탈출 등과는 별도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등이 엄존한 상태에서 공장노동자들로서는 처음 벌인 데모였다.

이소선은 소식을 전해 듣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일시에 폭발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었다. 자신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좋지만 결과적으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소선이 경찰서와 병원으로 연행된 노동자들을 면회를 가야 하나, 어쩌나 걱정하던 차에 저녁 8시께 노동교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오늘 사건의 주동인물인 박숙녀였다.

박숙녀는 경찰과 싸우는 과정에서 많이 다쳐 동부시립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노동교실로 전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세히 들어 보니 그는 동부시립병원 2층에 입원해 있었는데 경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해 2층에서 뛰어내려 지금 어린이대공원 근처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고 이소선은 양승조 총무부장에게 즉시 택시를 타고 박숙녀가 있는 곳으로 가게 했다. 양승조는 박숙녀를 만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놓았다.

주동자를 놓친 경찰은 당황했다. 게다가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단순가담을 했기 때문에 박숙녀 외에 다른 사람을 구속시킬 명분은 없으니, 경찰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소선과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은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시치미를 떼고 일상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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