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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44] 노조사무실에 다시 건 전태일 사진
▲ 노동교실 왼쪽 벽 위에 육영수 여사 사진이 걸려 있는 모습. 1976년 1월 근로자 위안잔치 모습. 민종덕
▲ 바위솔클럽(1976년 마석 모란공원) 민종덕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다음날 아침 공장장은 노조사무실로 찾아와 술을 먹고 실수했다며 사과하고 돌아갔다. 비록 공장장이 노조사무실에 와서 사과를 했다고 해도, 공장장의 폭행사건과 별도로 사장의 작업시간 위반 부분은 여전히 문제로 남았다. 노조에서는 밤 8시 이후에 작업을 절대로 시키지 않겠다는 사장의 각서를 받아 내기로 했다.

그래서 조합원 30여명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삼양사 점포가 있는 통일상가 1층으로 몰려가 진을 쳤다. 사장은 멈칫멈칫하다가 할 수 없다는 듯 종이를 들었다. 그 순간 통일상가 경비반장과 주위에 있던 다른 점포 사장들이 몰려왔다.

야간작업 금지 각서 놓고 맞부딪힌 노사

"각서 써 주지 마요! 노조가 뭔데 각서를 받아? 한번 싸워 보자고!"

조합원들과 사장들이 들어찬 삼양사 실내가 갑자기 험악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그래 한번 싸워 보자고! 썅 매일같이 와서 죽칠 테니, 어디 장사해 먹을 수 있는지 봐라. 우리야 애당초 가진 게 없어 손해고 자시고 없으니 해 보자!"

양쪽에서 큰소리와 함께 욕설이 오갔다. 그러는 사이에 지부장이 달려왔다.

"여러분, 오늘은 일단 철수합시다. 그리고 앞으로 싸움 준비를 제대로 해서 본때를 보여 줍시다."

철수하자는 지부장의 말에 조합원들은 마지못해 물러나서는 각자 공장으로 일하러 갔다.

"어디 두고 보자! 누가 이기는지 해 보자!"

조합원들은 각자 흩어졌다. 이소선과 지부장, 상근간부들은 노조사무실로 올라왔다. 2시간쯤 지났을까, 느닷없이 수명의 경찰이 노조사무실로 들이닥쳤다. 폭력사건으로 이소선과 지부장, 조직부장과 교선부장을 조사하겠다며 경찰서로 가자는 것이었다. 웬 날벼락인가 싶었다.

"이봐요, 누가 누구를 어떻게 폭행했다는 말이요?"

"고소가 들어와서 조사하려고 하는 것이오. 가 보면 알 것 아닙니까?"

"누가 고소를 했다는 말이요?"

"아, 박천일이라는 사람 몰라요?"

박천일은 삼양사 공장장 이름이었다. 아침에는 제 발로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빌고 갔던 자가 이제 와서 고소를 한 것이다. 이소선과 조합 간부는 폭행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경찰서로 갔다.

그런데 삼양사 사장이 형사와 함께 나가더니 2시간 뒤에 진단서를 들고 왔다. 진단서에는 '1주일 치료를 요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때부터 경찰은 이소선 등을 폭력범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경찰과 업주들이 새 집행부의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일부러 건수를 만들어 내려는 속셈임이 분명했다.

"자기가 지 머리를 벽에다 들이받고, 자기 마누라를 폭행했으면서 남한테 뒤집어씌우는 저런 개 쌍놈의 새끼, 저런 새끼 말만 믿고 우리한테 사람 때렸다고 조사하는 거요?"

이소선은 경찰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노조 간부들은 조사를 못 받겠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나중에야 대충 조사에 응해 주고 밤 10시30분쯤 경찰서에서 나왔다. 이들은 나오자마자 노동교실로 갔다. 조합원들이 빽빽이 앉아 농성을 하고 있었다.

농성장에 들어서자 조합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간부들을 맞았다. 어떤 여성조합원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소선은 조합원들에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용주와 정부당국의 비열한 탄압을 확인했습니다. 경찰도 공장장이 우리한테 행패를 부렸다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오히려 우리한테 폭행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정부당국과 사용주가 야합을 해서 우리 노동조합을 탄압함으로써 힘을 약화시키려는 저의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뜻을 굽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굽힌다면 저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짓밟으려 들 것입니다."

연행되는 노조간부들

"옳소!"

노동교실이 떠나갈 듯 박수소리와 함성이 터졌다.

"여러분, 이 사태를 계속 지켜보시면서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결단해야 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그때를 대비해 오늘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조합원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서, 노조 간부들을 불법 연행할 때에는 즉각 대처할 것을 결의하고 각자 집으로 갔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전 시장상가에 '삼양사 사건을 주시하고 있는 노동자 일동' 명의로 된 <삼양사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라는 제하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남성 조합원들의 모임인 '바위솔' 회원들이 뿌린 것이었다. 바위솔 회원은 민종덕·배철수·최현진·이한성·김기철·백기범·박석화 등이 주축이 돼 산하에 '야생마크럽', '육가크럽' 등의 모임을 꾸리며, 혈기 방장한 회원 30여명이 움직이는 짱짱한 조직이었다.

이들은 유인물을 통해 당국과 업주의 야비한 처사를 폭로하는 동시에 4명에 대한 부당한 불구속 입건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삼양사 사장에게는 공장장을 사주해 고소하게 한 것과 저녁 8시 이후에 작업을 시킨 것을 6월24일 대의원대회에 나와 공개적으로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삼양사 공장장과 그의 부인을 무고 혐의로 구속하라는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천명했다.

유인물이 뿌려지자 곧바로 중부경찰서 정보과장이 노조사무실을 찾아와 유인물을 배포한 주동자가 누구냐고 캐묻는가 하면 "'○○○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라고 쓴 것을 보니까 꼭 북괴에서 내려보낸 삐라와 비슷하단 말이야"라면서 공갈을 쳤다.

이에 맞서 조합원들은 매일같이 점심시간에 50명·100명씩 가게에 가서 한 시간씩 농성을 했다.

1976년 6월24일 제6차연도 정기대의원대회가 개최됐다. 그러니까 집행부가 바뀌고 처음 맞이하는 정기대의원대회였다. 그런데 마침 이날 대의원대회장에 삼양사 공장장을 폭행한 혐의로 조합 간부들한테 벌금 통지서가 도착했다. 이에 대의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벌금을 낼 수가 없고, 끝까지 싸워 사용주들의 야비한 행동을 응징할 것을 결의했다.

노조가 강경하게 투쟁을 하자 결국 삼양사 사건은 벌금 5만원에 불구속 기소했던 것을 불기소 처분하는 것으로 끝났다. 삼양사 사장의 사과도 받아 냈다.

6월24일 대의원대회에서 또 하나의 결의가 있었다. 이전 집행부 시절 정보기관의 압력에 의해 노조사무실에 걸려 있던 전태일의 사진을 떼어 낸 일이 있었다. 부당한 압력에 굴복한 것을 분개해 하던 조합원들이 전태일의 사진을 다시 걸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결국 이날 다시 걸게 된 것이었다.

강경한 노동자 투쟁에 검찰 불기소 처분

대의원대회에서 바위솔 회원이 중심이 돼 태일이의 사진을 다시 걸기로 했다. 이들은 우선 주위 동료들한테 왜 전태일의 사진을 걸어야 하는지 설득했다. 그들은 단순히 형식적으로 전태일의 사진을 노조사무실 또는 노동교실에다 거는 게 아니라 전태일의 뜻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한 조합원들의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대의원대회의 마지막 순서인 기타 토의사항에 들어가기 직전에 대의원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긴급제안을 제출했다.

"대의원 동지 여러분! 우리 다 같이 저 앞을 보십시다. 저 앞에는 지금 누구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까? 육영수 여사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본인은 어떤 연유로 해서 육영수 여사의 사진이 걸려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기에는 다름 아닌 전태일 동지의 사진이 걸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태일 동지의 사진을 거는 것이 단순히 형식적으로 노조사무실 또는 노동교실에다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태일이의 뜻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받기 위한 조합원들의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청계피복지부의 노동교실에 육 여사의 사진은 걸면서 왜 전태일 동지의 사진은 걸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동지들이 다 아시다시피 전태일 동지는 자신의 젊은 육신을 불태워 3만여 우리 시장상가 근로자의 권익쟁취와 더 나아가 이 땅의 모든 억압받는 근로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기 위해 죽어 갔습니다. 이에 우리 청계피복지부는 전태일 동지의 위대한 뜻을 받들어 결성된 노동조합입니다. 전태일 동지의 값진 희생 없이 어떻게 청계피복지부가 만들어졌겠습니까? 어떻게 근로조건이 개선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청계피복지부의 노동교실에 전태일 동지의 사진이 걸려 있지 않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겠습니까? 전태일 동지 사진 하나 걸지 못하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들이 분명하게 결의해서 우리의 손으로 직접 걸어 놓읍시다!"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흥분된 말이 끝나자 대의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옳소" 하는 함성을 터뜨렸다. 의장인 지부장이 긴급동의에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자 모두가 손을 들었다. 만장일치였다.

대의원 몇 명이 나와 전태일의 사진을 걸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 다닐 때 어디 야유회를 갔다가 입에 사탕을 물고 있는 채 찍힌 사진을 확대했다. 사진 옆에는 전태일이 살아생전에 썼던 글을 표구해서 걸었다.

이소선은 잃어버렸던 아들 태일이를 다시 찾은 것 같았다. 반갑고, 아쉽고, 한없이 그리운 사랑스런 이름, 그는 조그맣게 "태일아!" 하고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셀 수조차 없이 여러 번을….

그리고 표구해서 걸어 놓은 글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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