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종오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경남사무소)

어린이집·유치원·학교 등에서 알릴 사항이 있을 때 가정에 보내는 서신 형태의 문서. 흔히 '가정통신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학교에만 가정통신문이 발송되라는 법은 없다.

중소기업 몇 개를 사실상 지배하는 있는 K회장의 아이디어도 거기서 시작됐다. ‘가정통신문, 그야말로 좋은 생각 아닌가. 회사에서 이미 노동조합에 가입한 근로자들한테 뭐라 한들 지들끼리 있으면 아무 효과가 없다. 노조를 한다고, 회사에서는 이말 저말 막 하기도 하지만, 처자식 있는 인간들은 처자(妻子)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 처자들이야 노조를 하겠어 뭘 하겠어.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먹힐 만한 내 이야기를 바로 하자 이거지.’ 그리하여 K회장은 가정통신문을 발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K회장은 자기가 월급을 주는 근로자들 외에 그 월급으로 생활하는 근로자들의 가족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진화해 갔다. 가정통신문은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가족들을 압박하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입에 계속 풀칠하려면 당신 남편들 단속 잘하시오”와 같은 냉혹한 압박 수단이 됐다. 예상보다 강고한 노조의 기세로 임금협상이 난항에 부딪히자 K회장은 가정통신문에 이렇게 썼다.

“저는 이미 다른 기업에 투자해 현재 생산·판매활동을 하고 있으며, 본 공장의 폐업시 공장설비를 매각하기로 약속도 돼 있는 상태입니다. 본 공장의 폐업시에도 사업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만 여러분들의 가족은 직장을 잃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유념하시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게끔 내조를 당부드립니다.”

위 가정통신문은 ‘난 잃을 게 없는 사람이다. 나랑 싸워서 얻어 갈 것도 없을 것’이라는 경고 협박이었고, 저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면 ‘가진 자의 약 올리기’였다.

“약 오르지롱~ 약 오르지롱~ 공장은 폐업하고~ 너는 직장 잃는데~ 나는 아~무 손해 없지요~” 그랬다. 진실로 K회장은 폐업하더라도 자기는 손해 볼 것 없다고 했던 그 길을 닦고 있었다. 노조는 혹시나 하면서도 K회장이 투자했다는 회사를 찾았고 결국 보고 말았다. 떡하니 걸려 있는 자신들의 공장간판을. 그걸 이제라도 알게 해 줬느니 가정통신문이 행한 선(善)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악(惡)은 처음부터 그 크기를 알기 쉽지 않는 법이다. 가정통신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제는 폐업한다. 너희가 파업이라면 난 직장폐쇄다”라는 문구로, 근로자들의 처(妻)들을 수회 강타했지만, 그것을 두고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가족을 괴롭히는 형태의 신종 부당노동행위이기 때문에 법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고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편지질이 집집마다 부인에게 읽히고 그만큼 가정의 근심이 더해 갔지만, 이걸 두고 노동부가 반노동조합 회유·협박이라고 봐 주지는 않을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 탓이다.

그러던 중 2014년 10월의 어느 날 2012년 임금협상이 파탄으로 끝나자 노조는 5월에 파업을 했다. 회사가 이어 직장폐쇄를 한 지 130여일, 그동안 월급을 집에 한 푼도 가져다주지 못한 어느 조합원의 가정에서 악(惡)이 꽃을 피웠다. 그 집은 어떤 집인가. 주소상 그 집은 K회장의 가정통신문이 가장 먼저 배달되는 곳이었다. 그곳엔 긴 한숨을 내쉬던 어느 조합원의 부인이 있었다. 돈은 없고 애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회사가 폐업한다”니. 애들이 학교에 갔다 오기도 전에, 남편이 귀가하기도 전에, 혼자 K회장이 보낸 종이쪽지로 그 ‘폐업’이라는 단어로 된 날벼락을 홀로 맞았던 그 부인. 부인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돈은 얼마 없다. 힘들었다”며 목숨을 거뒀다. 그 부인의 정신세계 마지막에, K회장은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을까. 아니 K회장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라도 있을까.

어쨌든 장례식장에선 조합원들이 술잔을 들이킨다. 험한 욕설도 나온다. “가정통신문. 그 X같은. 지가 뭔데? 우리들 집에까지 그런 걸 날려 보내!” K회장은 대한민국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K회장은 분노한 근로자들이 우르르 자기 집 앞을 찾아가 소리라도 크게 외칠라치면, 대한민국 헌법의 “사생활 보호” 조항을 누구보다도 빨리 내놓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 추신: 이 이야기는 실제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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