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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42] 험난한 노동운동 계속하란 말 못하지만, 나는 내 길을 간다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많은 조합원들이 작업시간이 짧아진 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소선은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노동시간단축이 투쟁을 통해 실질적으로 관철되자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조직이 급격히 확대됐고, 무슨 일을 하든 조합원이 성황을 이뤘다.

그러던 중 일부 조합원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노동시간단축 투쟁을 한 조합원들한테 항의하는 일도 발생했다. 노동시간단축 농성을 마친 지 며칠이 안 돼서의 일이다. 통일상가에서 일하는 미싱사라면서 10여명의 나이 먹은 조합원들이 밤에 노동교실로 몰려왔다. 그중 몇몇은 결혼한 아주머니들이었다.

임금인상 가두시위 투쟁 시도

"누가 노동시간을 단축시킨 거요? 우리들 수입만 줄어들었잖아! 어떻게 할 거야!"

투쟁위원들을 겨냥하고 하는 소리였다. 완전히 한바탕 붙어 보려고 작정을 하고 온 사람들 같았다. 투쟁위원들과 지난번 농성에 참가했던 잠바집 미싱사 정선희와 임금자 등 수명의 미싱사들이 그들 주위에 둘러앉았다. 각자 돌아가면서 그들을 설득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오셨는지 차분하게 얘기를 하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여러분하고 똑같이 공장에서 미싱 밟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사정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렇게 다짜고짜 시비조로 얘기하면 어떡합니까?"

"아, 다른 게 아니라 우리들은 잠바집 미싱산데 대목 한철에 일을 해서 비철에 먹고사는데 이 바쁜 철에 일을 일찍 끝내니까 수입이 줄어들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일을 더 하겠다고 사장한테 말을 했더니 사장이 하는 말이 노조에서 못하게 해서 일을 시킬 수가 없으니까 따질 테면 노조에 가서 따지라고 하데요."

잠바집 미싱사들은 객공(점퍼 한 벌당 공임단가를 정해 자신이 만든 숫자만큼의 공전을 수입으로 하는 제도로 일종의 도급)이기 때문에 겨울 한철 눈에 불을 켜고 일을 해서 수입을 올려야 비수기인 여름철을 버틸 수 있다. 오야미싱사(기능이 좋은 고참 미싱사)는 보조미싱사와 미싱사에 딸린 시다 두 명, 도합 4명이 한 조가 돼 공임을 받는다. 오야미싱사는 그 공임으로 보조미싱사와 시다들의 임금을 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갖는다.

"하여튼, 잘 왔습니다. 여러분들도 우리들의 뜻을 알면 충분히 이해를 하실 거예요. 생각해 봅시다.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몸이 부서져라 미싱을 밟아도 우리들이 버는 돈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장시간 힘든 일을 하니 무쇠덩어리라 해도 온전할 리 있겠습니까? 오랜 시간 뼈 빠지게 일을 해서 수입을 조금 더 올리려고 생각하기보다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휴식을 취하면서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방법이 어디 있나요?"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싸워서 얻어야 합니다. 지금 저녁 8시에 끝나는 것도 일찍 끝난다고 불만이 많은가 본데 8시에 끝나도 하루 10시간이 넘습니다. 근로기준법에는 1일 기본 근로시간이 8시간으로 돼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일을 많이 하고 있어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원칙적으로는 하루 8시간만 일을 해도 생활이 가능해야 하는데, 시장 일의 특수성을 감안해 저녁 8시 작업종료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간단한 문제입니다. 8시에 일을 끝내고도 예전 11시에 일을 끝낼 때처럼 수입이 같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방법은 임금을 인상하는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중심이 돼 잠바 만드는 미싱사·보조·시다들이 똘똘 뭉쳐서 요구하면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객공미싱사 공전을 쉽게 올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시다월급을 오야미싱사인 여러분들의 공전에서 주지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의 수입에서 일부를 떼어 주던 시다월급을 사장들이 직접 주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공전인상을 따로 안 해도 자연적으로 시다월급을 줬던 만큼 공전이 인상됩니다. 그리고 시다들은 여러분들이 주던 임금보다 많이 요구해서 사장한테서 받게 되면 시다임금도 오를 겁니다. 사실 시다들이 코피 터져 가면서 왜 일합니까. 미싱사 일이 아니라 사장 일을 해 주는 것 아닙니까. 고용은 사장이 하고 월급은 미싱사가 주는 그런 잘못된 제도가 어디 있습니까. 근로기준법에도 임금은 사용주가 직접, 본인에게, 일정한 날, 전액 현금으로 주게 돼 있습니다."

"아! 그렇게 하면 참 좋겠네요. 그런데 단합이 잘 안 돼요."

"단합이 잘되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우리들 생활과 직결돼 있는 문제인데 누가 외면하겠습니까?"

투쟁위원회에서는 애당초 노동시간단축 투쟁을 계획할 때 시간단축으로 인해 감소되는 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임금인상 투쟁을 염두에 뒀다.

임금인상 투쟁에 공감하는 노동자들

항의하러 온 미싱사들은 오히려 설득을 당하고 돌아가게 됐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 임금인상 투쟁에서 선봉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하는 투쟁위원회'는 투쟁위원회 체계에서 벗어나 항시적인 조직으로 발전할 필요에 의해 조직을 개편하기로 했다. 노동시간단축 농성투쟁에 참여했던 조합원들이 중심이 돼 '횃불회'를 조직했다. 횃불회는 체계가 잘 잡혀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다만 그동안 어렵게 함께 투쟁한 동지로서 상호 뜨거운 애정과 신뢰로 지탱되는 모임이었다.

76년 초부터 횃불회 회원들은 그해 봄 임금인상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추모의 밤과 노동시간단축 농성을 준비하던 광희동의 배철수도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러니 청계천 근처 가까운 곳에 매일같이 드나들면서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소선이 잘 아는 종로 5가 동대문시장에 여인숙을 잡아 놓고 거기에 회원들을 모이게 했다. 이소선은 이들에게 저녁밥과 아침밥을 먹이는 것은 물론이고 여인숙 비용까지 내야 했다. 헌옷장사를 해서는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회원 각자가 회비를 내기도 하고, 각자 활동비는 자기 돈으로 쓰긴 하지만 먹고 자는 비용은 이소선이 만들어 내야 했다.

생각 끝에 안 되겠다 싶어 쌍문동 이소선 집 근처에 있는 여인숙에서 만나되, 밥은 이소선이 집에서 해서 밤늦게 머리에 이고 여인숙으로 가지고 갔다. 밥을 먹고 나면 함께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잠잘 때가 되면 이소선은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집으로 가서 잠깐 눈을 붙였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밥을 해서 여인숙으로 가지고 갔다. 몸은 고되지만 밥값은 절약됐다.

횃불회 회원들은 몇 날 며칠을 이 여인숙 저 여인숙을 전전하면서 논의하고 고민한 끝에 투쟁계획을 확정했다. 주요 내용은 △시다의 임금을 월 1만2천원에서 2만원으로 인상하고 미싱사와 재단사 임금은 50% 인상할 것 △시다의 임금을 미싱사에게 맡기지 말고 주인이 직접 지불할 것 △능률급(객공) 미싱사의 기본급을 보장할 것 등이다.

투쟁할 날짜는 3월10일 근로자의 날로 정했다. 당시에는 노동절(메이데이)이 없었다. 대신 정부가 한국노총 창립일을 '근로자의 날'로 지정했다. 그날 평화시장 앞길에서 가두시위를 하기로 했다.

임금교섭 날 가두시위 결의

근로자의 날인 3월10일을 거사일로 잡은 이유는 정부와 한국노총이 한통속이 돼 이날 하루 체육관에서 형식적인 행사를 치르고 쇼나 하면서 노동자 현실을 호도하는 것에 맞서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내외에 폭로함으로써 그들의 기만적인 작태를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투쟁방법은 가두시위였다.

그런데 3월10일에 쉬는 공장이 많았다. 그날 시장 앞길에서 가두시위를 했다가는 인원동원이 안 될 것 같았다. 구경하는 사람이라도 많아야 고립되지 않을 텐데, 쉬는 날 데모를 했다가는 전부가 붙잡힐 수도 있었다. 노조 집행부가 임금교섭을 하는 3월26일 오후 1시로 거사일을 변경했다.

26일을 하루 앞둔 25일 밤에도 조합원들은 쌍문동 이소선의 집 근처에 있는 여인숙에서 밤을 새웠다. 밤새도록 피켓·어깨띠·머리띠 등 데모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했다.

한쪽에서는 등사기로 선언문을 미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선언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노동자도 인간이다. 노동자도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 숨 막히는 현실을 보라! 13시간 이상 뼈와 살을 깎는 아픔을 이겨 가면서 건강과 젊음을 송두리째 빼앗겨 가면서 휴식과 공부는커녕 몸 아플 시간마저 갖지 못한 채 일을 하고서도 밥 먹는 것마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당장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죽지 못해 일하고 있는 것이다. 치솟는 젊음은커녕 핏기마저 바싹 마른 노동자의 얼굴을 보면서도 살이 너무 쪄서 걱정을 하는 저 사장족들을 보면 우리 노동자들은 기껏 저들의 살을 찌우는 인간비료밖에 아니란 생각에 치솟는 분노를 억누를 길 없다. 물가는 다락같이 오르는데 우리들 노동자의 임금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니 이대로 가다가는 잘살게 되기는커녕 배가 고파서도 못살게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밤을 꼬박 새운 이들을 위해 이소선은 없는 돈을 구해 쇠고기에다 대파를 큼직큼직 썰어 넣고 고춧가루를 벌겋게 넣어 얼큰하게 끓였다.

투쟁을 준비하는 이들은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혈색이 말이 아니었다. 국물을 푸짐하게 떠서 거기에다 듬뿍 밥을 먹는 이들을 볼 때 이소선은 참말로 흐뭇하고 사람 사는 맛을 느꼈다.

‘이 얼마나 건강하고 소박한 모습이냐! 이 얼마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도는 훈훈한 믿음과 사량이냐! 이들이 이렇게 건재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밥을 먹고 준비상태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뒤 각자 맡은 바에 따라 인원을 동원하러 가는 사람은 가고, 피켓이나 플래카드·유인물을 운반할 사람은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원 동원조는 각 공장을 돌면서 잘 아는 사람들을 통해 낮 1시20분에 평화시장 구름다리 밑에서 우리들의 임금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일 테니까 공장의 동료들과 함께 나와 보라고 얘기를 하는 방식으로 동원을 하기로 했다. 물론 잘 알고 통할 수 있는 사람들한테는 어느 정도 얘기를 할 수 있지만 데모를 한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데모를 한다는 사실이 미리 알려지면 데모도 하기 전에 경찰이 막을 수 있으니까 각별히 유의해서 인원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낮 12시쯤 신설동의 어느 다방에서 약속한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던 회원들 일부가 사전에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평화시장 앞으로 떠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화시장 앞에 미리 갔던 사람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큰일 났어요! 지금 평화시장 앞에 기동대들이 새까맣게 깔려 있어요. 경찰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 같은데, 몇 사람을 찾는대요!"

오늘 데모한다는 사실이 새어 나간 것이다. 회원들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회원들은 일단 평화시장 근처로 가서 상황을 관찰하기로 했다. 오후 1시가 되자 경찰병력이 더욱 증강됐다. 이런 상태에서는 도저히 데모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회원들은 평화시장 건너편에 있는 현저다방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사전에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지 않았던 문제라 뾰족한 대책이 나올 리 없었다. 데모를 일단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모두들 억울하고 허탈해서 한숨만 푹 쉬기도 하고, 허공에다 주먹질을 하기도 하고, 어떤 회원은 이빨을 오드득 갈았다.

새어 나간 정보, 새까맣게 깔린 경찰

3월26일 데모는 무산됐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경찰들은 주동자들을 잡겠다고 설치고 다녔다. 횃불회 회원들 대부분이 리스트에 올랐다. 그중에서도 잠바집 미싱사인 임금자를 찾았다. 임금자는 지난번 추모의 밤 때나 노동시간단축 농성투쟁 때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이번 임금인상 투쟁을 앞두고는 왕성하게 활동을 해서 통일상가를 중심으로 잠바집 미싱사들을 조직화했다.

잠바는 다른 옷보다도 계절적인 옷이기 때문에 성수기와 비수기가 뚜렷하다. 옷이 크고 무거운 탓에 잠바를 봉제하는 일은 다른 업종보다도 노동강도가 세다. 그렇기 때문에 잠바집 미싱사들은 성수기 한철(대개 늦가을에서 초봄까지) 동안 온몸이 망가지도록 일을 해서 돈을 벌어 비성수기를 살아간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잠바집 미싱사들은 거의 객공미싱사다. 잠바객공은 짧은 기간 동안 공임을 많이 올려야 하기 때문에 동료들 간에 경쟁도 치열하고 작업시간도 가장 길다.

따라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편이다. 이러한 특성이 있는 잠바집 미싱사를 조직화하기란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임금자와 정선희 같은 경우 잠바집 미싱사로서 기술과 경력이 오래된 데다 조직능력이 뛰어났다. 어려운 여건에 있는 잠바집 미싱사들을 효과적으로 조직화했다.

임금인상을 위한 가두시위는 무위로 돌아갔으나 현장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과시한 결과 단체교섭 과정에서 유리한 상황으로 작용했다. 즉 시다임금 사용주 직불문제를 잠바집 미싱사와 시다들이 끈질기게 요구해 관철시켰다. 미싱사의 공임인상과 시다임금 인상 효과를 얻어 낸 것이다.

이와 같이 추모의 밤, 노동시간단축 투쟁, 임금인상 투쟁 시도 등 일련의 투쟁은 노동조합 집행부가 아니라 현장 조합원들 중심으로 이뤄졌다.

박정희 정권은 71년 이른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특별조치법을 통해 노동 3권 중 단체행동권을 봉쇄해 버렸다. 72년에는 '10월 유신'을 단행해 독제체제를 강화했다. 이런 정치적·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주적인 노동운동은 위축되고, 어용 한국노총을 통한 노동통제가 심화됐다. 청계피복노조도 한국노총·전국연합노조 출신 간부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소선은 고민이 많았다. 아들 전태일의 죽음 위에 세워진 청계피복노조인데 한국노총식 노동운동이 계속된다면 전태일의 뜻은 영원히 멀어져 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갖게 됐다. 노동조합을 주어진 법 테두리 내에서 교섭 위주로 행정을 하듯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생명력이 없는 노동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장 조합원들과 함께 투쟁하는 길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집행부와의 오해와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집행부는 누구인가. 다름 아닌 그가 믿고 의지해 온 아들의 친구들이 아닌가.

좀처럼 울지 않는 이소선은 이때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애들아, 미안하다. 나는 내 길을 가야해. 태일이와 했던 약속을 나는 지켜야 해. 지금 너희들이 나를 야속하게 생각해도 할 수 없다. 언젠가는 너희들이 내 마음을 이해할 거야. 나도 너희들을 이해한다. 너희들은 이제 장가도 가고 가정을 이뤄야 할 때도 됐지. 이렇게 험난한 노동운동을 계속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누구를 믿고 노동조합을 했겠니? 그래서 나는 너희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일련의 투쟁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76년 4월9일 최종인 지부장을 비롯한 전체 임원이 사임했다. 이어 4월16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이전 집행부 중 한 사람인 이승철을 지부장으로 선출했다. 이소선은 연합노조 출신 최일호가 물러난 노동교실 실장이 됐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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